32. 그 애는 나 싫어해

by 차태주

그 애를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었던 나는 당연히 그 애와 같이 다닐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애를 피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애 반에 가까워지자 걸음이 느려졌다. 발걸음이 점차 처지다가 그 애 교실 앞에 다다랐을 때 결국 멈춰 섰다.

내 키 높이만큼 교실 창문을 가린 가림막 위를 힐끔 보니 1반 선생님의 얼굴이 빼꼼히 올라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열렬히 설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1반은 종례를 늦게 마치겠지.

이대로 지나갈까, 아니면 뻔뻔하게 기다려 볼까.

우두커니 서 있다가 괜히 발끝을 내려다봤다. 실내화 속 발가락들이 부질없이 꿈틀거렸다.

곧 2반 아이들이 방금 종례를 끝냈는지 문을 열고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복도를 지나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과 부딪히며 더욱 어수선해졌다.

복도 한쪽에 서 있으려니 더 많아진 아이들이 곁을 부딪치며 지나갔다. 부딪힐 때마다 몸이 조금씩 앞으로 떠밀렸다. 조금 버텨볼까 싶다가, 이내 휩쓸려 걸었다.

복도로 나왔을 때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까.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그러다 이내 홀가분해할 테지 분명. 사실은 나약하고 쓸모없는 주제에 그동안 귀찮게만 굴었던 내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편할까.

학교 건물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어느 연약한 손길이 살며시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왜 혼자 가는데?”

매일 그 애와 같이 집에 가는 걸 알고 있던 지혜가 왜 오늘은 같이 가지 않냐고 물은 것이다.

서로 먼저 나가겠다며 앞다투는 아이들과 부딪히는 게 싫다던 지혜는 항상 반 애들이 교실을 다 나가고 나면 주섬주섬 가방을 둘러매곤 했다. 그래서 매번 뒤늦게 학교를 나오던 지혜가, 어째선지 그날은 아이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내게 닿았던 것이다.

지혜의 뒤에는 같이 뛰어오느라 찬 숨을 고르고 있는 영미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채 서 있었다. 요즘 학교를 마치면 거의 맨날 둘이서 노는 모양이던데, 오늘도 영미 집에서 놀 건가 보다.

“아아,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기로 했어, 히히”

라며, 지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인데에? 중요한 일 아니면, 오늘 우리랑 놀면 안되나아?”

이상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걸까. 나는 애써 웃은 거였지만, 나름 어색하지 않게 표정 지은 거였다. 그런데도 지혜는 어째선지 걱정 가득한 표정을 한 채 내 팔을 슬며시 잡아당기는 것이다. 뭔가를 바라는 듯 날 똑바로 보는 지혜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애절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뒤에서 잠자코 있던 영미가 문득 헛기침하더니 끼어들었다.

“큼.. 큼, 니도 갈라믄 가든지, 니 가면 우리 엄마가 사과랑 배 엄청 많이 깎아 줄지도 모르는데”

깜찍한 기집애. 사과와 배로 나를 꼬시려 한다. 영미 집에 처음 간 날 아주머니가 깎아주신 과일을 꽤 맛있게 먹었던 걸 기억하는 걸까. 그래봤자 고작 2조각 먹은 거였지만.

“아니야, 오늘은 정말 일찍 가봐야 해, 다음에, 꼭 같이 놀자”

“치...”

자기 딴에는 나름 먹힐 거라 생각했던 건지, 영미는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터미날까지만 같이 가자”

지혜는 체념한 듯 말했지만, 걱정스럽다는 표정은 여전한 채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한동안 우리는 조용히 걷기만 했다. 내 손을 꼭 잡고 제 몸을 내게 가까이 붙인 채 걷는 지혜는 이따금 나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피는 듯도 했다. 조용히 따라오는 영미가 문득 궁금해 뒤돌아보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어색한지 녀석은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셋이서 같이 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인가. 이전 두 번은 영미 집에 가는 거였고, 이번엔 둘이서 나를 터미널까지 데려다주는 모양새인듯해 기분이 묘했다.

문득, 간간이 나를 올려다보던 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지혜는 여전히 뭔가를 바라는 듯 조금은 애타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왜 자꾸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걸까.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께, 뭐 했어?”

책상 책꽂이에서 참고서를 꺼내던 언니가 문득 물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빼던 나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언니를 돌아봤다.

그저께는 월요일이었지만 어린이날 전이라 수업을 안 했다.

종종 수업 중 잠깐 쉴 때나 수업을 마친 후 언니는 주말에 뭐 했는지 안부처럼 묻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그날은 만나자마자 별안간 묻는 것이다. 마치 정말로 그날 뭘 했는지 알아야겠다는 것처럼.

“그저께 너 봤어, 터미날로 가고 있더라?”

문득 그저께 시장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공황발작이라는 거겠지. 책에서만 봤던 트라우마를 내가 갖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나 같이 나약한 꼬마는 그러고도 남을 테지.

“그냥, 친구랑 놀았어”

그러니 언니는 작게 숨을 가다듬더니,

“친구 누구?”

어째선지 떠보는 듯한 말투로 다그치듯 하는 것이다.

필기구를 꺼내던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언니를 돌아봤다. 언니는 뭔가 변명이라도 하라는 듯 야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냥 친구, 왜?”

그러니 언니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냥 친구? 하하... 솔직히 말해, 언니 정말 다 봤어”

뭘 봤다는 거지?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뭘 봤는데?”

여전히 언니는 미묘하게 웃는 표정으로,

“걔, 누구야? 같이 가던 애”

봤다는 게 그 애를 말하는 거였구나. 그렇다면 손 잡고 가는 걸 봤다고 말하려는 건가.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친구”

“남자애던데?”

“그런데?”

“너는 친구랑 손 잡고 가니?”

“그럼 안돼?”

태연한 내 반응에 언니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윽고 조심스러운 듯 물었다.

“남자친구니?”

남자친구냐니. 12살짜리에게 자신의 잣대를 들이미는 언니의 그 한심함은 지금이나 그때나 참 여전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퍼뜩 이해되지 않았던 나는 그저 언니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사귀냐고, 걔랑”

답답한 듯 재차 묻는 언니는 그 순간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흥,”

나는 코웃음 쳤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알량한 명분으로 그 아이를 내 상처를 가리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는 걸. 그러다 초라하고 못생긴 상처가 드러나자 더 이상 그 아이를 잡을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러니 그 불쌍한 소녀가 과연 그 아이의 뭐라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아? 그저 코웃음 치며 언니를 비웃을 수밖에.

“뭐야?”

황당한 내 반응에 언니는 조금 얼이 빠진 듯했다.

그 얼빠진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하...”

그러니 언니의 표정이 이내 구겨졌다.

“왜 웃어?”

언니를 똑바로 마주 봤다.

언니, 언니가 감히 알아? 내가 왜 어른이 되려 했는지, 내가 어떻게 그 애를 붙잡고 있었는지. 그 애가 나를 어떻게 치유하고 있었는지 언니가 감히 아냐고.

파르르 입술이 떨리다가, 마음속에 감춰놓고 외면하던 진실을 그만 내뱉고 말았다.

“걘 나 싫어해, 언니”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울까 말까 싶다가, 그냥 울기로 했다. 이젠 어른이 될 필요가 없어졌으니 울어도 되겠지.

눈물이 앞을 가려 언니의 표정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실수였을까.

와락, 날 껴안은 언니의 품에서 흐느껴 울었다,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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