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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변호사 Mar 02. 2024

한 번 바친 내 마음, 다시 낼 곳이 있을까-김종욱 편

- 386이후세대를 모아가는 이영수 후보를 지지하며

김종욱은 경희대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과거를 배우고, 올바른 나라를 세우는 실천을 함께하는 즐거운 대학시절이었다.


96년 여름, 대학생들이 모여 ‘통일대축전’행사를 진행했는데, 당시 김영삼 정부는 그 행사가 주한미군철수 등 친북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여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매일 9시 뉴스가 시작하면 연세대에서의 데모가 30분간 뉴스에 나왔다. 김종욱은 겹겹이 봉쇄된 연세대 안의 실상을 알리라는 임무를 띠고 조용히 연대를 빠져나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8월 17일 일간지 신문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하자, 뉴스를 보고 명동성당으로 부모님이 찾아왔다. “이제 네 할 일은 다 한 것 아니냐? 자수해서 조사받고 이제 집으로 가자! “. 김종욱은 매정하게 부모님의 손을 뿌리치고 명동성당에 남아 농성을 이어갔다. 김종욱의 어머니는 2023.12. 22.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에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더없이 차가운 아들이었던 순간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 사랑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시민과 함께 싸우면 승리한다고 믿으며 즐거이 보냈던 대학시절이었건만, 시민들은 따귀를 때리기도 하고 “이 빨갱이 새끼들 북한에나 가라”며 막말을 이어갔다. 이런 유의 통일행사는 어쩌면 전대협 선배들로부터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인데, 정작 전대협동우회에서는 우리들을 비판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그래서 김종욱에게는, 96년은 자기 인생의 가슴에 박힌 기둥 같은 시간이다. 그 나라 젊은이로서 외국군대의 철수를 주장하고, 상호 간의 체제인정을 통해 낮은 단계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자고 주장한 것이 왜 적군을 대하듯이 탄압받을 일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기 전에 내가 왜 연세대 친북난동의 주도자가 되었는지 알고는 죽고 싶다”. 그래서 김종욱은, 1996년 통일축전에 대한 차분한 정리와 평가를 희망한다.


소설 빠찡코의 첫 문장처럼, 역사는 김종욱을 - 우리들을 배신했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김종욱은 대학막판 남들 앞에 선 죄로 2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어떻게 살지 고민했다. 여기저기 단체를 찾아다녔으나 마뜩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삼촌이 여행사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너 특별히 할 일 없으면 내 여행사 나와서 일도 배우고 사회경험도 해 보지 않을래?” 그렇게 작은 여행사에서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모든 게 인터넷으로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항공권 예약은 항공사마다 다른 시스템을 쓰고 있어서 교육을 따로 받아야 했다. 여권을 만들고,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대만 등 비자가 필요한 여러 나라들은 비자발급받는 방법을 배워 실제 그 나라들의 비자 발급받는 일도 대행했다. 재미나는 일들이었다. 그 무렵이 또래들의 결혼이 많은 터라, 친구들의 신혼여행지 예약을 도와주기도 하고, 재미나게 지냈다. 그런데 슬슬 직급이 올라가, 여행사 운영을 위한 영업까지 맡게 되자, 천성이 원칙대로만 살아온 김종욱으로서는 뭔가 더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그는 신장이 좋지 않은 지병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일이 겹쳐 여행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여행사를 그만둔 후부터는 주한민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상근자로 1년간 일했다. 하필이면 2002년에. 효순-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궤도차량이 치어 숨진 그해다. 김종욱은 한일 월드컵을 단 한경기도 보지 못했다. 매일같이 의정부 지역 미 2사단 부대 앞에서 여중생, 여고생들과 집회를 하며 보냈다. 결국 격무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상근은 그만두었다. 그 뒤로는 경희대학교 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을 맡아 16년을 일했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다. 사회단체 상근만 20년을 넘게 한 셈이다. 그 몸으로 이제 좀 편하게 지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으련만.


김종욱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상당히 진일보한 나라다. 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직선제 대통령선거제도가 도입되어, 야당이 집권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원내 최대 다수의 의원을 보유하게 된 것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고. “우리들이 원했던 민주화는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드는 방향으로의 민주화였는데, 삶의 진일보는 눈에 띄는 성과는 크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 재벌들의 곳간만 배불려 주는 민주화였으니까요”.


또, 정보통신혁명으로 국가기관만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가 끝난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취득한 정보를 맹신하여 상대방의 주장과 이야기를 아예 듣지 않는 모습도 고착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막말로 말을 해도 들어주는 놈이 하나도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죠. 자연히 공동체는 약화되고 파괴되고, 개별화된 개인들만 존재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봅니다. “


이젠 40 후반, 50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친구들이 하는 푸념을 들으며 산다. 어느새 기업에서 야근과 추가근무가 부여되어도 군소리 없이 수행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IMF를 겪느라 이리저리 치이고, 경쟁 속에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누린 것 없이 의무만 너무 많은 삶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냐고. “전 이 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조언이니 잔소리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냥 이 세대들의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 혹은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속 깊은 곳에 감추고 살아왔던 그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만 줘도, 의학적으로는 정신적 병이 깊은 상태일 수 있는 많은 동기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종욱과 함께, 남자 마담이 있는 그 살롱을 꼭 만들어 보고 싶다.


김종욱은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나선 이영수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이영수 후보가 농민을 대표하는 한편, 40대들의 이런 경험을 함께 해결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백 한 줄 한 줄이 모여서, 하루 만에 소비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우리가 간직해야 할 내용으로 정리되기를 희망한다.

(마석 모란공원 청소와 정리를 20년째 하고 있는 김종욱. 사진은 참석자들에게 망자의 생애를 설명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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