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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드라마 <김성호의 회상>

by 담담댄스
요즘은 잘 없겠지만, 그 시절 라디오에선 '뮤직드라마'라는 장르가 있었습니다. <김기덕의 골든디스크>, <이소라의 음악도시> 이런 프로그램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요즘의 드라마처럼 특별히 스펙터클하다거나 반전의 묘미가 있다는 식은 아니었지만, 음악을 모티브 삼아 잔잔히, 그리고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드라마의 형식을 빌어 들려주었죠.

문득 <김성호의 회상>을 부르는 김성호 님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통속적일 수 있지만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내용이 좀 뻔한데요, 귀엽게 봐주세요 ㅎㅎ


(지영의 나레이션)

여기 지금 내 앞에 단정한 차림의 노신사가 앉아 있다. 가진 게 없던 그 시절에도 차림새 하나만큼은 늘 단정했던 사람. 단 두 벌의 옷을 돌려 입었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다림질을 하고 나왔는지... 마치 군인의 그것처럼 바짝 줄이 선 셔츠와 바지는 이 사람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만나러 오는지, 그리고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오직 얼굴에만 깊게 패 있을 뿐, 여전히 그의 옷엔 주름하나 없었다. 포마드로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와 흠 없는 구두. 존재감이 두드러지진 않아도 은은하면서도 정갈한 향기까지. 그때와 달라진 건 아마도 그의 옆을 그처럼 좋은 사람이 오랫동안 지켜주었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ㅡ 성호: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ㅡ 지영: 응... 성호씨는?


ㅡ 성호: 응... 뭐. 아까 옆에 있는 여성 분은 혹시...?


ㅡ 지영: 맞아. 내 딸이에요.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같이 밥도 먹고, 그림도 보고요.


ㅡ 성호: 아... 그렇구나. 르누아르 전이 열린다고 해서 나도 마침.






Chapter 1. 비오는 날의 수채화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성호의 나레이션)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국에 있는 어느 미술관에서였다. 변변찮은 살림에도 뒷바라지에 유난이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 알량한 학위 하나 받으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나는 노골적인 차별을 견뎌내야만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적응이란 걸 해나가고 있을 무렵, 불현듯 대학원 동기 녀석이 공짜로 얻게 됐다며 미술관 티켓 한 장을 주었다.


그림이라곤 교과서에서 봤던 고흐밖에 몰랐던 나. 그런데 미술관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곳이었다. 다채롭게 조각난 마음속 상처 하나하나를 저마다의 보색으로 덮어주는 느낌이랄까. 발걸음이 유난히 한 작품 앞에 머물렀다.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80~1881), 필립스 컬렉션 소장


ㅡ 지영: 르누아르 좋아하세요?


ㅡ 성호: 네?


ㅡ 지영: 우와, 한국 분 맞으시네요. 저, 여기 와서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나요.


ㅡ 성호: 아... 네


ㅡ 지영: 근데 왜 제 질문엔 답을 안 하세요?


ㅡ 성호: 아, 잘 모릅니다. 우연히 머리 좀 식히려 들렀는데, 그림이 너무 좋아서 그만...


ㅡ 지영: 오! 저는 르누아르 참 좋아해요.



Chapter 2. 우연히 Paris에서



우연히 너를 마주친 이 거리는
찌푸린 하늘만큼 우울한 곳~♬


(지영의 나레이션)

사실 그 그림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가난한 유학생 차림의 그 남자가 이상하게 눈에 들었다. 머나먼 땅에서도 굳이 국산 메이커의 운동화를 신고 온 동포 청년임을 한눈에 알아봤지만 모르는 척했다.


ㅡ 지영: 유학생이에요?


ㅡ 성호: 네, XX에 있는 OO대학에서 박사 과정 밟고 있어요. 아! 김성호라고 합니다.


ㅡ 지영: 지영이에요. 이지영. 저는 △△ 예술학교에서 서양화 배우고 있어요. 여기서 한국 분을 만나다니 몹시 반가운데요?



Chapter 3. 좋을텐데



좋을텐데... 너의 손 꼭 잡고 그냥
이 길을 걸었으면 내겐
너뿐인 걸 니가 알았으면 좋을텐데~♪



ㅡ 지영: 성호씨는 왜 연락을 안 해요?


ㅡ 성호: 네?


ㅡ 지영: 어휴, 매번 내가 성호씨 학교로 오는 거 알고 있어요? 혹시 내가 이러는 거 부담스러워요?


ㅡ 성호: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이래도 되나 싶어서요


ㅡ 지영: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ㅡ 성호: 아니 지영씨는... 옷 입은 것만 봐도 부티가 난달까. 저는 보시면 알겠지만 돈도 없어서 옷도 두 벌로 돌려입는 거 아시잖아요. 겨우 바게트 빵하나로 하루를 나고요. 또 저는 이번에 박사 이거 꼭 따서 돌아가야 돼요. 다른 데 정신 팔릴 여유 없어요.


ㅡ 지영: 누가 뭐래요? 그런데 왜 맨날 우리 학교에 와서 작업실 근처에 왔다갔다 하다 그냥 가는 거예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ㅡ 성호: 그... 그건...


ㅡ 지영: 됐어요. 저도 뭐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ㅡ 성호: 지... 지영씨, 잠깐만요!



Chapter 4. 편지


(성호의 나레이션)

그녀는 생각보다 좋은, 아니 훌륭한 여자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궁상맞은 순간이 오면 특유의 풍요로움과 여유로 덮어주었다. 그러나 덮어주었지 결코 지워주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배려였다. 그녀는 나의 자존심마저 사랑해 주었다. 주는 사랑을 아끼지도,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생색내지 않았으며, 받는 사랑에는 실제 받은 것보다 더 큰 만족감과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럴수록 난 불안해졌다. 찰나에 찾아오는 행복함이 지속되는 불안감을 증폭시켜 나갔다.


이걸 내가 가져도 되나


싶은 마음조차 사치였다. 그녀가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 그리고 언젠간 남의 것이 되리라는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ㅡ 지영: 성호씨, 한국에 꼭 지금 들어가야 되는 거야? 정말, 정말, 미안한데...... 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잣집 막내딸처럼 해볼게. 성호씨 여기서 한 학기만 공부 더하고 우리 같이 들어가자.


ㅡ 성호: 제발... 지영아...... 그러면 나도 가난한 유학생 자존심 좀 세워보자. 너한테 얻어먹은 밥만으로도 이미 넘치게 받았어. 그렇게 주고도 줄 게 더 남았어? 그만해, 이미 오래 끌었어. 너도 알잖아. 어차피 오래 만날 사이가 아니라는 걸.


ㅡ 지영: 성호씨... 제발......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성호의 나레이션)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로 그녀의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그 편지를 차마 읽지 못하고 쌓아두고만 있었다. 그리고, 단 한 통의 답장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의 간격으로 반년을 이어온 편지는 그렇게 끊겨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아니 내가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은, 실제로는 나의 비겁한 의도에 다름 아니었다. 당신을 사랑한단 이유로 당신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절박함에 나는 가슴을 쳤다. 다만 한 가지 마음 쓰였던 것은


한평생 르누아르의 그림처럼 컬러풀했을 그녀의 인생에서
나를 지워내는 데 쓴 시간만큼만 유일하게 흑백으로 남지 않을까


그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처절한 흑백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총 천연색의 삶이 더욱 선명도와 해상도를 높여 그녀를 찾을 것이라는 씁쓸한 자기 합리화로 버텨냈다.



Chapter 5. REPLAY


ㅡ 혜연: 혹시...... 김성호 씨 맞으세요?


ㅡ 성호: 아, 혹시 그때 봤던......


ㅡ 혜연: 네, 맞아요. 이지영 씨 딸입니다.


ㅡ 성호: 그런데 여긴 어떻게?


ㅡ 혜연: 아, 어머니가 대신 가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거...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성호의 나레이션)

30년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편지봉투였다. 그녀의 딸을 보내고, 나는 앉은자리에서 그녀의 편지를 처음으로 뜯어보았다.



(지영의 나레이션)

성호씨, 안녕.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라도 보니 참 좋았달까. 아니 정말 미웠달까. 아냐, 진심으로 좋았어. 내가 보낸 수많은 편지 중에 단 한 통이라도 성호씨가 봤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몇십 년 만에 만나지는 않았겠지만, 어쩌겠어.

그런데 성호씨, 혹시 계속 마음 쓰며 살았어? 아마 아니겠지만 몇십 년을 그러고 살았다면 이제라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거야. 사실 그때 성호씨랑 헤어진다는 사실보다는 그 먼 곳에서 홀로 남을 몇 달의 시간을 견딜 수 없다는 게 무서웠을지도 몰라. 알잖아, 철없는 부잣집 막내딸.

다시 돌아오지 않을 편지인 줄도 알았지만 미친 사람처럼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만 같았거든. 지금이라도 다행이야, 그 편지를 성호씨가 읽지 않은 것 같아서. 그 슬픔과 원망의 말들을 보지 않아서. 그렇게 이별 후에 남겨진 찌꺼기 같은 감정으로 다시 만나봤자, 당신이 이토록 아름답게 남아있지는 못했을 거야.

성호씨랑 헤어지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르누아르 그림 있잖아. 그 그림을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만,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거 알아? 시선이 어긋난 그 작품에 발길이 머물렀던 성호씨를 바라보며, 어쩌면 우린 안 될지도 모르겠다 싶더라.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겨우 잊을 수 있긴 했지만 말야.

아마 오늘 내가 나가지는 못할 것 같아. 대신 우리 딸 한 번 봐줘. 나를 너무 안 닮긴 했는데, 그래도 나보다 더 예쁠 거야. 나이가 들어 아주 가끔, 성호씨 얘기를 한 적 있거든. 다행히 우리 딸은 내 편이라... 오늘도 만나보라고 카페도 직접 알아봐 줬는걸.

그래도 언젠가는 성호씨를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 아, 사모님께 실례되는 말이려나. 알잖아, 옛날부터 내가 뭘 해보자는 뜻은 아니라는 걸.

부디 잘 지내. 그리고 혹시라도 다음번에 만나면, 옷은 바꿔 입어 주길 바라. 은퇴한 교수 정도면 이제 세 벌 정도는 있을 거 아냐 ^^ 정말 반가웠어. 잘 지내.




넌 나를 사랑했었고 난 너 못지않게 뜨거웠고
와르르 무너질까 늘 애태우다
결국엔 네 손을 놓쳐버린 어리석은 내가 있지






Epilogue. 회상


(성호의 나레이션)

그 편지를 끝으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성정을 잘 알기에 어떤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부고 소식에 간단한 답신을 보냈더니, 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이미 오래 남지 않은 삶이었음에도 나를 진심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운 좋게도, 정말이지 지독한 사랑을 받고 살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흑백의 시간을 지나 수수하지만 다채로운 색으로 그녀를 칠해준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그리고 그녀의 성정을 물려받은 이가 세상에 남아 있어서. 홀로 버텨온 속죄의 삶이 이렇게라도 보상받는 것 같아서.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그녀는 조그만 손을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눈을 보았지

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어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멀어져 가는 뒷모습 보면서
두려움도 느꼈지

나는 가슴 아팠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질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한두번 원망도 했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하지만 꼭 그렇진 않아
너무 내 맘을 아프게 했지
서로 말없이 걷기도 했지만
좋은 기억이었어

너무 아쉬웠었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질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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