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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쓰고 싶다

잡도리? 하소연? 넋두리? 꼴값? 그쯤 어딘가에서 담담통신입니다

by 담담댄스

나는 내 글의 최애독자다. 그러면서도 가장 신랄한 비평가이기도 하다. 좋은 문장을 쓰고, 잘 엮어서 배치하고, 의미와 통찰을 창출해 내는 동료작가님들을 볼 때마다 곧잘 살리에리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서울시에 거주하는 이 살리에리는 다행히 모차르트들을 질투한다든지, 동경만 하다가 인생을 마감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가 승리자의 서사이듯, 사실 살리에리는 그저 모차르트와 사이만 안 좋았지 열등감에 사로잡힌 2인자는 절대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 전부를 거론할 수는 없지만 좋은 글을 쓰는 작가님들이 정말 많다. 브런치의 또 하나의 묘미? 재미? 라면 독자로서 마음껏 애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이런 분들을 보면서 시나브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다. 라이킷과 댓글 숫자는 좋은 글을 보장하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가늠자가 되지만 때론 반응이 적은 글에서도 좋은 울림이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좋은 글을 읽는 일은 한없이 즐거운데 좋은 글을 쓰는 것은 한없이 고통스럽다. 심지어 고통스러운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그래서 가급적 매일 쓴다. 매일 쓰다 보면 확실히 글은 점점 늘고, 때로는 예기치 않게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매번 고민한다고 좋은 글을 쓸 수는 없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매번 고민해야 하는 세 가지에 대해 짧게 생각해 봤다.



1. 양질의 경험


사실 이건 셋복이다. 양질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어느 정도의 운(내지는 불운)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운/불운은 작위적인 시도가 필요 없으니 특별한 것이 없다. 결국 노력에의 의지가 중요한데, 여기엔 또 기질적인 차이가 다분하다.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열여덟의 나이에 훌쩍 배낭여행을 떠나 유럽 어느 소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공장에 취직해 시계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남는 시간에 니체의 철학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예술학교 입학준비도 병행한다.

그러던 중 현지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한다. 이것이 그녀의 삶이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지 모르겠지만(아마 지구상에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이 정도의 경험을 했다면 그 경험을 단순히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특별하고 재밌는 글이 될 것이다. 당연히 이만한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럴 의지를 갖출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특별한 경험을 하는 이유가 단지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굳이?'라는 생각도 든다. 특별한 경험을 감상으로 남기는 일은 권장할 만 하지만 특별한 감상을 남기고자 억지로 특별한 경험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하나는 평범한 경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특별한 경험을 나의 간접경험으로 삼는 방식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를 쉽게, 잘하기 위한 방법은 동일하다. 많은 콘텐츠를 접하는 방법뿐이다.


좋은 책, 좋은 글, 좋은 음악, 좋은 영화, 좋은 드라마는 언제나 즐거운 글감이다. 나와 비슷한 경험으로 얼마든지 특별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천재들이 주변에 많다. 특별한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접하면 나도 모르게 함께 겪은 것만 같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많이 경험하고, 많이 보고 듣고, 많이 읽을수록 좋은 것 같다.



2. 남다른 생각


중학교 때 배운 '낯설게 하기'를 기억하는지. 늘상 주변에 있는 사물들, 사람들, 사건들을 새롭게 보고 재해석하는 습관을 들였던 것은 예상대로, 예상외로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됐다.


PD를 준비하던 시절, 스터디를 통해 매주 한 번씩 특정한 주제를 놓고 '작문'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작문은 웬만한 방송국 시험에 필수로 등장하는 과목이다. 사실 작문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글은 객관식 시험처럼 정답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취향의 영역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문 스터디를 하면서 분명히 느낀 건, 취향을 넘어서는 수준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주제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40분의 시간 동안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쓰는 연습을 했는데, 다 쓰고 난 후 돌려가면서 자유롭게 서로의 글에 대한 의견을 적었다. 이를 반영해 한 번의 퇴고를 거쳐 나름의 완성도 높은 글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분명히 글쓴이의 취향은 견고해지고, 수준 역시 한층 높아지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지금은 작문 스터디를 할 수 없으니, 남다른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단상이나 문장을 잊어먹기 전에 핸드폰에 정리해 둔다. 그리고 그 생각을 발전시켜 브런치에 유난스런 흔적들을 남겨본다.


사실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 매일 쓰다보니 글의 퀄리티를 통제할 수 없어 발행 주기를 조절하면서 양질의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님들이 부럽기도 하다. 실제로 그렇게 해본 적도 있는데 뭔가... 헛헛했다. 그렇게 쓴 글들이 매일 쓴 글과 비교해도 내 눈에 퀄리티 차이가 그렇게 크지는 않더라. 이렇게 남다른 생각을 양산해 나가다 보니 어떤 글은 몹시 만족스럽다가도 어떤 글은 제 손으로 발행해 놓고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으면 싶을 때도 있다.


따지고 보면 남같은 생각이 공감을 얻을진대, 남다른 생각으로 공감을 얻어내는 건 정말 쉽지 않겠다. 내 생각이 남다른 생각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동료작가나 대가들은 이걸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다.



3. 정확한 표현


글을 쓸 때 생각이나 경험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잘 없다. 하나의 문장은 하나의 생각, 감정, 상황만 표현할 수 있다. 정확한 단어를 선별하는 작업에 중요도를 부여하지 않으면 글의 힘이 빠지고, 독창성이 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한' 단어가 아니라 '정확한' 단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독 네임드 작가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이 있다. 이를테면 '불콰하다'. 나는 소설가들이 작품에 이 표현을 꼭 한 번씩은 넣어야 하는 일종의 미션 같은 것이 있나 의문을 품었던 적도 있다.


언제부턴가 나도


꼭 한 번은 내가 만취한 사람 이야기를 쓸 때 불콰하다고 써봐야지


별렀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각이 어리고, 어떤 단어를 멋대로 부릴수록 지적 역량이 드러난다고 믿었던 속물이었나 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 표현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불콰하다는 말은 요즘 말로 술톤인데, 꼭 만취한 경우에만 쓰는 말은 아닐뿐더러, 지금의 나는 그냥 술톤이라고 쓰기로 했다. 어휘력을 뽐내기 전에 가장 보편적인 말로 가장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 그게 더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정확함에 대해 한 마디 덧붙여 보자면, 소설가 김영하가 한예종에서 극작 수업을 할 때 밝힌 일화가 떠오른다.


그는 본인의 수업에서 학생들이 글을 쓸 때 절대로 '짜증난다'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다양한 양태의 안 좋은 감정들을 그저 짜증이라는 한 단어로 퉁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하게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더욱 정확한 표현을 골라 쓰는 훈련이 소설가에게 필수라 여겼던 것이다.


시험을 보는데 공부한 건데 생각이 날듯 말 듯 잘 안 난다 → 짜증난다(X) 막막하다(O)

여자친구가 기념일을 잊어버렸다 → 짜증난다(X) 서운하다(O)

엄마가 살찐다고 먹던 피자를 뺏어서 동생을 준다 → 짜증난다(X) 서럽다(O)


정확함에 대한 집착이 좋은 문장을 쓰는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정의하는 호모 OOO이라는 표현이 많지만 호모 스크립투스, 쓰는 인간이 가장 인간다움을 잘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종종 내가 내 글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큰 욕심 없이 이것저것 쓰다 보면 글이 나를 이끌어 내가 바라는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지. 어쩌면 특별함, 남다름, 정확함이 없어도 나를, 그리고 여러분들을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글이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글이 아닐까.


이상 담담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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