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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과 서태지*

by 담담댄스

수년 전, 회사에서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이자 대중음악 평론가로 활동 중인 배순탁 님의 특강이 열렸다. 좋은 강의가 끝나고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한 사람 꼽자면 누굴까요?



그가 답했다.


서태지입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가 생각한 두 명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서태지와 조용필 중에 답을 고르고 있었다. 결론 끝에 나도 서태지라는 답을 얻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史)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조용필이라 답했을 것이다. 조용필은 당대의 대중음악 최전선에서 길을 이끌고 섞여 들었던 역사 그 자체라면, 서태지는 K-POP의 선구자다. 마치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처럼, POP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대중음악 유행기의 핵심 개념과 테크닉을 들여온 선구자. 나는 역수출의 신화로서 빌보드 차트에서 거둔 BTS 성공의 원동력을 찾고자 시류를 거슬러 오른다면 최첨단에 서태지가 있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서태지를 우리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뮤지션으로 꼽는 이유는 세 가지다.






1. 대중음악의 주류를 바꾸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대중음악은 트로트와 발라드, 그리고 작지만 존재감 있는 락과 댄스음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앞서 서태지와 함께 조용필을 언급한 이유는 조용필 역시 트로트 음악으로 데뷔했지만 한국형 발라드(<창 밖의 여자>)와 전자음악(<단발머리>), 락(<모나리자>) 등 ‘위대한 탄생’이라는 밴드 사운드 기반의 다양한 장르적 시도에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필의 음악은 클래식이 되었고, 서태지의 음악은 현재 대중음악의 주류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K-POP의 원형을 서태지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겠다.


서태지의 음악적 기반은 락이었다. 그가 예명을 태지로 지은 것은 여러 설이 있지만 <X-Japan>의 베이시스트 타이지(Taiji)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그의 영문 표기는 Taeji가 아닌, Taiji다)


진한 메탈 사운드를 지향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가, 랩 중심의 댄스뮤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기까지의 간극을 내 정보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데뷔 앨범을 락이 아닌 랩 베이스의 댄스음악으로 잡은 것은 시대적 흐름을 영리하게 읽은 것으로 파악한다. 이미 김완선, 박남정, 현진영 등 댄스가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 잡아가는 와중에, 당시 춤꾼들의 성지였던 이태원 문나이트에서 활약한 양현석과 친분을 쌓기도 하는 등 시류를 파악하는 눈이 밝았던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서구권의 주류음악이었던 힙합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으며 (물론 서태지의 데뷔곡을 힙합으로 볼 수는 없지만, 보컬보다 랩이 많았던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판단했다), 한국어로도 랩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장르적 관점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동시대에 활동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듀스의 음악이 훨씬 본토의 힙합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서태지를 문익점으로 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후 많은 힙합 뮤지션과 아이돌 가수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과 무대를 보고 뮤지션을 꿈꾸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언컨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은 K-POP의 시작이다.


* 여기서 떠오르는 한 명의 가수가 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겠지만 김수희다. 1993년 2집 <하여가>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을 1위 후보로서 꺾었던 유일한 가수이자 그 해의 가요대상 수상자다. 제2의 전성기, 중흥기를 맞은 트로트가 한동안의 암흑기에 접어든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수희의 <애모> 이후다.




2.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꾸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춤은 '백댄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음악의 보조 역할에 그쳤다. 안무가와 댄서들은 늘 메인 가수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어두운 배경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하지만 서태지는, 비록 '아이들'이었지만 안무가를 멤버로 영입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이전에도 나미와 붐붐, 현진영과 와와라는 팀 형태의 활동이 있었지만, 붐붐과 와와는 여전히 백업 댄서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댄스팀 이름이 있는 게 더 낫나 싶기도 하다. '아이들'이라니 ㅠㅠ 나중에 양현석은 그룹명이 Taiji Boys라서 받아들였다고 한다;;;)


서태지는 본격적으로 을 음악의 테두리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국내 최고의 댄서였던 양현석과 이주노를 멤버로 영입한 것은 물론, 본인 역시 최선을 다해 춤을 배웠고 어색하지 않은 수준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저 댄스 장르 중 하나로만 생각했던 '브레이크 댄스'를 위해 특별히 '댄스 브레이크'라는, 오직 춤을 추기 위한 사운드를 곡 중간에 별도로 할애하기도 했다. 멤버였던 두 명의 춤꾼이 끼를 발산하면 할수록, 무대의 퀄리티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높아졌다.


스타일링의 개념 역시 최초로 도입한 아티스트다. 본인의 음악 색깔에 맞는 의상을 골라 무대에 올랐고, 이는 패션 트렌드로 번져나가기도 했다. 서태지 이전까지는 그 어떤 누구도 배우나 모델이 아닌, 가수의 의상을 따라 입지는 않았다. <난 알아요> 데뷔 직후, 전국 거리에서 Tag을 떼지 않은 벙거지 모자와 컬러풀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10대와 20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통이 넓고, 신발을 덮는 것도 모자라 바닥을 끌고 다니는 '힙합바지'를 처음 입은 것도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뮤직비디오는 또 어떠한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도입한 것은 아니지만, 2집 <하여가>의 뮤비에는 최초의 댄스배틀이 등장하며, 3집의 <발해를 꿈꾸며> M/V는 그 배경을 철원의 노동당사로 삼을 만큼 '통일'이라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스노보드 프리스타일을 담은 4집의 <프리스타일>의 뮤직비디오는 지금 봐도 구성과 영상미가 촌스럽지 않다.



이러니 '문화대통령' 소리를 듣는 게 아닐까.


* 국내 최초로 현대식 뮤직비디오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가수는 놀랍게도 조용필이다. (가왕이시여 ㅠㅠ) 당시 16살이었던 무려 '김혜수'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했고, 본인은 남자주인공으로 분해 <허공>이라는 노래에 맞는 드라마타이즈 형식의 뮤비를 선보인다.



3. 대중음악 팬덤을 10대로 바꾸다


서태지 이전의 가수들의 대중음악을 향유하던 주요 팬덤은 20대와 30대, 그리고 트로트를 즐기던 40대 이상으로 나눌 수 있었다. 10대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은 없었다. 그저 2030이 좋아하는 댄스와 발라드 음악을 따라 듣거나 해외 팝 아이돌(뉴키즈 온 더 블럭 같은)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영어 가사로 된 뉴키즈 온 더 블럭 노래를 찾아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태지 역시 1, 2집의 주요 메시지는 사랑과 이별이었지만, 3집부터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내며 본격적으로 10대들을 위한 노래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사탄숭배 소동으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교실이데아>의 사운드와 가사는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 어쩌면 이 메시지를 희석시키기 위한 음모론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후 등장한 아이돌, H.O.T.나 젝스키스 역시 데뷔곡에 철저히 10대들의 메시지를 담아 팬덤 형성의 구심점으로 삼는 등 아이돌 음악과 메시지의 전형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집부터 서태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락 사운드 위주의 트랙리스트로 재편돼 갔지만, 그로 인해 더욱 메시지의 파급력은 한층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주제에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노래가 바로 4집의 타이틀곡 <컴백홈>이다. 수많은 가출청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낸 노래이자, 갱스터랩을 최초로 한국에 들여온 곡이기도 하다. 나도 이 노래를 듣고, 무대를 보며 비니와 선글라스를 쓰고 모든 장기자랑에서 친구를 팔 안으로 통과시켰던, 춤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던 노래다. 당시에는 몰랐다, 이 앨범이 '서태지와 아이들'로서 낸 마지막 앨범이 되리라는 것을.


양현석의 무브는 가히 Art의 경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적인 해체는 '소개'에 머무르지 않고, '도전'에 목말랐던 그의 음악적 욕심을 위한 '댄스 브레이크'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의 수많은 명곡 중에 단연 한 곡을 꼽자면, 나는 이 노래다. 당시의 트렌드와 음악적 정체성, 지향점에 한데 모여 장르적 한계를 벗어나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어떻게 마스터피스로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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