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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라는 계기, 고통이라는 글감

배대웅 작가님의 「감정의 경제, 사유의 빈자리」를 읽고

by 담담댄스


처음으로 브런치 글에 대한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이 글은 '할많하않' 침묵으로 일관해 오던, 어쩌면 알고도 외면해 왔던 주제에 대해 포문을 열어준 작가님께 보내는 경외이자, 해당 글에 대한 오마주다. 내가 브런치에서 최고로 꼽는 명문가이자 사유인(人), 배대웅 작가님의 정확한 시선아래 놓인 다정함을 놓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배대웅 작가님의 정확한 삶의 궤적과 흔적을 알 순 없지만, 짐작컨대 그보다는 내가 좀 더 굴곡진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아니시라면 댓글로 반론 ㄲ)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나는 '없이 자랐지만, 귀하게 자랐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곱게 자라는 과정으로부터 철없음(?)과 모나지 않은 성격을 물려받았고, 없이 자라는 과정에서는 낄끼빠빠 스킬과 냉정한 메타인지를 물려받았으니 비극적 결말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없이 자라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아픔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 적어 내려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나의 불행을 감히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의 비웃음을 사거나 공감받지 못할 수준은 아닐까

나의 불행으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원치 않게 트라우마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나의 불행을 밝혀 유무형의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이 정확히 같은 값의 행복으로 교환될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자연재해나 불가역적인 운명의 탓이 아닌, 사람으로 인해 얻은 상처로 불행해지고 아파봤다면 그것이 어쩌면 참다참다 터져 나온 고백이나 비도덕, 부조리에 대한 고발의 의도를 담았을지라도, 나와 같은 경험으로 각자 다른 고통을 느꼈을 이들에게 부차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타고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의 감도, 내겐 그 역치값이 몹시 낮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모두가 불행해지는 영화 「곡성」을 추천한 친구에게 쌍욕을 한 적도 있고, 아직까지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모두가 수작이라고 일컬었던 「오월의 청춘」 같은 이야기를 마주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불행을 다룬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누군가의 불행을 직면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꾸짖어가면서도 말이다.






타인의 불행도 아니고, 자신의 불행을 글감으로 활용한다는데 사실 뭐라 할 구석은 없다. 자신의 불행을 글로 옮기는 그 마음을 감히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행을 거래라 친다면 몹시 불공정한 거래일 것이다. 이따위 단어밖에 쓸 수 없는 내가 몹시 한심하지만, 상실감이 만족감보다 큰 거래. 이 불행에 대한 상실감을 만족감이 아닌 최소한 0의 상태, 평정심으로라도 돌려놓고자 정말 '뭐'라도 하고픈 그 마음을, 겪어보지도 않은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브런치에서 나는 그토록 어려운 고백이 너무나도 쉽게 소비되는 것처럼 느꼈다. 불행을 계기로, 고통을 글감으로 삼아 지은 글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결정을 점심 메뉴 정하는 것처럼 쉽게 내리는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하지만 고통의 순간순간을 상기하며 다시금 고통으로 쓰인 글들을 감상하는 행위 역시 쉬울 수는 없는, 쉬워서는 안 될 노릇이다.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는 상상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며, 어떤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기에 작가의 마음을 가늠해 나가며 조심스레 읽혀야 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플랫폼 탓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고, 무책임한 일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이 문제만큼은 '브런치'를 탓할 수밖에 없다. 브런치는 그 불행을 적극적으로 전시하고 홍보한다. 이러한 글들은 멤버십 추천, 급증 작가, 요즘 뜨는 브런치북, 인기글 등 곳곳에 노출돼 많은 사람들에게 관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대다수의 독자들이 범람하는 불행 콘텐츠를 인스타그램 피드를 올리듯 소비할 수밖에 없는 UX 환경이다. 그러한 플랫폼 설계가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든 상관없든, 불행은 도파민으로 치환돼 공감이라는 형식의 반응으로, 더욱 직관적인 숫자로 남는다. 브런치는 이렇게 가능성 있는(?) 불행 콘텐츠를 자체 플랫폼을 넘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드나듦이 많은 포털사이트에까지 노출시켜 버린다.


불행의 쉬운 소비는 쉬운 생산을 유발한다. 인기를 얻은 불행 이야기는 시리즈물이 되고, 극소수의 작가님들은 불행을 계기로 고통을 글감으로 다룬 시리즈에 숫자가 붙을수록, 그 유명세를 글감으로 또 하나의 글이나 시리즈로 종종 써내려가기도 한다. 불행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극복해 낸 이야기가 아닌, 불행이라는 계기를 마치 기회로 삼는 듯한, 고통이라는 글감을 자랑으로 삼는 듯한 후속작업까지 내 깜냥으로 받아들이기엔 불가능했다.


문제는 이렇게 브런치 월드에서만 벌어지는 현실이 배작가님이 지적한 공감이라는 화폐, 감정의 경제를 넘어 실익이 오가는 창조경제의 새로운 챕터로 넘어왔다는 사실이다. 이를 고통의 상실감을 만족감으로 바꿔보려는 일종의 거래 형태라고 매정하게 말해본다면, 그 당사자가 취하는 이익 말고도 그 불행과 고통을 전시해 함께 이익을 취하는 플랫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는가.


어려운 생산을 쉽게 소비시켜 얻는 금전적 이득. 플랫폼은 그 과정에서 창작자에 대한 위로나 사회적 문제로의 공론화, 담론화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는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 플랫폼의 역할이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한다면, 더는 논쟁할 가치도 없는 문제이긴 하다.






배작가님이 피력한 '감정의 진열을 넘어 사유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는 글쓰기의 가치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감정의 진열' 그 자체만으로도 불편함은 왜 나의 몫인지 한 번쯤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글이 처절한 심정으로 불행과 고통을 한 땀 한 땀 써내려 온 많은 작가님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부디 불행이라는 계기를, 고통이라는 글감으로 옮겨 적는 과정에 수반됐을 또 다른 이야기를 폄하하는 의도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을 작가님들에게는 깊은 미안함을 전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한 구절로 오늘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나는 인간이라면 타인의 슬픔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마음으로 배우지 못해 글로나마 조금 익힐 수 있었다. 부디 어쩌지 못하는 불행과 고통을 겪어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과 행복의 시간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ㅡ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8P 中 (2018,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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