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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엔지니어 Nov 24. 2024

엔지니어는 무엇으로 사는가

엔지니어의 나침반

얼마 전 내가 담당했던 반도체가 신제품으로 우리 회사의 웹사이트에 올라왔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의 큰 장점 중에 하나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품 하나를 이끌어가면서 완성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표된 새로운 반도체는 내가 처음으로 완성해 낸 반도체이다.


사실 이 일은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나간 사람이 하다 만 일을 받아서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종류의 반도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상사의 말에 이 반도체를 맡게 되었다.


그 뒤로도 유독 이 일에서만큼은 잡음이 너무 컸다. 미팅에서 프로젝트 초반부터 의견충돌이 시작부터 있었고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사람도 유독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 할 수만 있다면 이 프로젝트를 포기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넘기면 안 되냐는 의견을 내 상사에게 피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없었고 결국 싫지만 꾸역꾸역 내가 끝까지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마무리를 하고 드디어 이 프로젝트에서 탈출이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지내고 있던 날, 갑자기 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매니저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우리가 했던 반도체가 모든 절차를 마치고 세상에 나왔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연락이었다. 그래서 회사 공식 웹사이트에 가서 확인해 보니 실제로 내가 담당한 반도체가 신제품으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고생과 피로들이 싹 잊히고 뛸 듯이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완성한 결실이 회사 웹사이트에 소개되다니. 뿐만 아니라 이제 이 반도체는 이제 여기저기 팔려나가 실제 사람들이 생활에 사용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생각이 들자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과 보람이 느껴졌다. 


박사 학위를 하면서 여러 개의 논문을 썼고 그때마다 보람을 느꼈지만 실제 제품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는 보람은 그보다도 훨씬 더 컸다. 논문이라는 건 이 세상에 이 논문이 도움이 될지 안될지도 전혀 감을 잡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논문이 통과되지 않기도 하고 또 정말 의미 없는 논문이 통과되기도 한다. 사실 박사 학위를 하면서 더 이상 교수직을 희망하지 않게 된 계기 중에 하나는 의미 없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써내는 일에 지쳐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만든 제품은 그 제품 자체로서 이 세상에서 평가를 받을 것이다. 거짓말을 보탤 수도 안 좋은 것을 좋다고 속이기도 힘들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제품은 작든 크든 이 세상에 기여를 할 것이다. 남다른 보람이 느껴졌다.


이전에 친한 엔지니어가 나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개발한 제품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면서 자랑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 그의 지루한 자신의 과거 제품들을 다 들어주는 것도 지겨웠고 자신의 이름이 박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큰 자부심을 느끼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내가 한번 경험해 보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 쓰임을 받는 것 그 자체가 주는 보람이 크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대체될 수 없는 보람이며 이런 기쁨과 보람으로 엔지니어들은 산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다. 자신만의 길을 가려면 나침반이 있어야 한다. 잘못된 나침반을 가지고 방향을 잡았다가는 낭떠러지로 달려갈 수도, 방향을 종잡을 수도 없는 곳에 도달해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잘못된 나침반으로 열심히 달려갔는데 다 가서 보니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 엔지니어에게 잘못된 나침반은 돈을 좇거나 타이틀을 쫓아 달려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끝에는 어떤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제대로 된 나의 나침반을 찾은 것 같다. 엔지니어의 나침반은 제품이 되어야 한다. 엔지니어는 제품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자신이 설계하고 자신이 구현해 낸 그 제품만이 엔지니어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잡음일 뿐이다. 물론 나침반은 어디에 웅덩이가 있는지, 어디에 정글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어쩌면 웅덩이에 빠질 수도, 정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써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짓말하지 않는 나침반을 손에 쥐고 길을 걸어 나간다면 그 어떤 장애물도 그 끝에는 모두 다 지나간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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