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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엔지니어 Dec 26. 2024

올해도 책을 한 권 썼다

일하면서 배우는 것의 가치


새해가 다가올 때쯤 내가 꼭 사는 것이 있다. 바로 여러 장의 종이를 넣어 보관할 수 있는 3공 파일 바인더이다. 아무 곳에나 가면 살 수 있는 흔한 물건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기에 매년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어떤 모델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심사숙고해서 고른다. 내년에 1년 내내 나와 함께 할 물건이자 내가 평생 동안 보관할 물건이기 때문이다.


처음 취업을 했을 때 배우는 것이 매우 많았다. 물론 내가 있는 직장에서의 일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지만 직업이 엔지니어인 나는 공학 이론과 실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가령 새로운 실험을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왔는데 그 원인이 뭘까? 이것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결국 기초적인 공학 이론에 대해 물어보게 되고 찾아보게 되고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기술 자료도 찾아보게 되고 그 끝에는 논문이나 책도 읽게 된다. 이렇게 일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는 도중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의사가 자신의 수술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오늘 배운 것을 기록하는 것을 해보자. 그렇게 해서 내가 오늘 새로 배운 공학 지식들과 실험실에서 배운 요령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미래에 오늘 배운 지식들이 또 필요할 수 있으니 그때 가서 다시 논문을 찾아보고 인터넷의 기술 자료들을 다 뒤져보는 비효율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그저 단순히 내가 오늘 배운 공학 지식을 요약해 찾아보기 쉽도록 기록해 놓는다는 취지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가 더해졌다. 퇴근해서 돌아와 오늘 아무것도 기록할 것이 없으면 나는 오늘 엔지니어로서 발전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었다. 적을 수 있는 게 많은 날이면 스스로의 성장에 뿌듯했다. 일을 하다가도 이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대강 넘길까? 하는 유혹에 빠져들 테면 확실하게 알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를 해야 오늘 밤에 뭐라도 기록할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오늘 배운 것을 기록하는 그 습관은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올해도 무엇인가 배운 게 있을 때마다 그것을 기록했다. 그렇게 올해도 나만의 책을 한 권 썼다. 수백 장을 넣을 수 있는 바인더 하나가 꽉 차서 더 이상 종이를 넣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몇 장인지 세어 보진 않았어도 올해도 내가 무엇인가를 많이 배웠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올해 첫 장부터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이때는 이것도 몰라서 적어두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고 적어두고는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식들도 있다. 작년 것도 들여다보니 작년의 바인더에는 "내가 이것도 몰랐었나" 싶은 내용이 훨씬 많은 걸 보니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논문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마치 그것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학점에 목숨 걸고 논문개수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배우려고 마음을 먹으면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 배우는 것의 질 또한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훨씬 좋다. 엔지니어로서 무언가를 만드는데 필요한 진짜 지식은 현장에 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경력이 더 쌓였다고 해서 더 실력이 좋아지지 않는다.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뒤처진다는 것도 나는 많이 체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일한 만큼 실력이 늘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고 온 사람보다 되려 실력이 떨어짐을 나는 목도했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실력이 얼마나 늘었느냐 이것은 회사의 관심사가 아니다. 도태되고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대체자를 찾고 해고시키면 그만이다. 때문에 일하면서 더 배우기 위해서는 결국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을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한다는 것을 매일매일 느낀다. 


전 세계에서 우수한 인력들이 공학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언제나 더 어리고 더 최신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이 되고 그들 중 다른 일부는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탑클래스 엔지니어로 성장한다. 이 차이는 결국 일하면서 얼마나 자신을 성장시켰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후자의 일부가 되고 싶다. 나는 내가 있는 조직에서, 더 크게는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 같은 회사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한 노동자로서의 절박함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은 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을 내 삶의 보람 중에 한 가지로 삼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는 파란색 체크무늬가 그려진 바인더를 샀다. 내년에도 한 해 동안 이 바인더를 꽉꽉 채워 넣을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많이 배우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무언가 적어 넣을 수 없을 만큼 내가 맡은 일이 쉽거나 혹은 일하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 배울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있는 이곳을 과감하게 떠날 생각이다.


올해의 바인더에는 2024라는 숫자를 써서 스티커로 붙였다. 며칠 후 새해가 되면 내 책장 깊숙한 곳에 넣을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 8년 후에는 10개의 바인더가 쌓일 것이고, 18년 후에는 20개가 넘는 바인더가 쌓일 것이고, 30여 년이 더 흘러 내가 60대가 되었을 때에는 30개가 넘는 바인더가 내 책장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바인더만큼 나는 실력이 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30년 후의 모습에 대한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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