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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윔지테일 Oct 06. 2024

찌질이의 용기_1. 재훈

<어젯밤> 안녕바다

2018년 5월 17일.


 학교 정문을 지나 야트막한 오르막을 조금 올라오고 나니 넓은 잔디 위에 세워진 간이 부스로 가득하다. 평소라면 조용했을 저녁의 캠퍼스가 온갖 조명과 학생들의 활기, 음식 냄새, 그리고 호객하는 소리로 혼을 쏙 빼놓았다.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싶어 뒤집어쓴 검은색 모자의 챙을 있는 힘껏 광대뼈까지 눌러보지만 누구의 시선을 끌까 싶다. 사실 재훈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다. C 대학교 입학 면접을 망친 뒤 바로 자원입대를 신청해 버린 게 화근이었다. 남들은 다른 대학교로 가라든지, 정 C대학이 가고 싶으면 재수를 하라든지 말이 많았다. 하지만 C 대학 말고는 미련도 없고, 재수를 하느니 죽는 게 낫다 생각한 재훈은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나 끝내버리자 싶어 입대도 2월로 정해버렸다. 입대 사흘 전에 추가합격 전화를 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미 깎아버려 잡아 쥘 것도 없는 머리를 감싸며 급하게 입학금과 휴학계를 동시에 내고, 남들이 오리엔테이션을 기다릴 때 재훈은 본인이 자초한 나라의 부름에 응했다.


그래도 입학한 학교인데 가보지도 못한 것이 못내 억울해서 신병 위로 휴가 3박 4일 중 시간을 내어 간 학교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온갖 주점들과 동아리 홍보가 가득한 곳에서 문헌정보학과 주점은 의외로 너무 심심해서 쉽게 눈에 띄었다. 한쪽 구석 파란색 천막 위에 도서분류번호와 프로그래밍 언어 몇 개만 붙여놓은, 다른 학과에 비해서는 꽤나 단순한 인테리어를 가진 주점의 이름은 <문헌정보학과 - 도서관 아닙니다>.  하지만 주점 이름과는 다르게 몇 개 없는 테이블에는 앉아 있는 손님도 없고 직원들도 자못 차분하게 있어 책만 없다 뿐이지 도서관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에 다른 과 주점이 몰려 있지 않았다면 쉼터나 간이 휴게소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냥 보기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한산한 모습을 보자니 우리 과 돈이나 벌게 해주자 싶었다. 용기를 내 플라스틱 등받이 의자에 앉으니 앞치마를 허리에 졸라매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애가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혼자요.”

“아. 뭐 드실래요?”


파라솔 꽂이 구멍이 있는 둥그런 파란색 테이블에 테이프로 붙여 놓은 메뉴판을 읽어봤다. 궁서체로 메뉴와 가격만 써져 있다. 콘치즈, 떡볶이, 계란말이, 제육볶음, 콜라, 사이다…


“술은 없네요?”

“올해부터 축제에서 술 판매 불법이래요. 그래서 메뉴 시키시면 가격에 따라 술 한 병씩 드려요. 오천 원 이상은 맥주, 만 원 이상은 소주.”

“술 안된다면서요.”

“술을 파는 게 불법이지 우리가 서비스로 주는 건 못 막는다던데요.”


 문득 주말에 내무반에 각 잡고 앉아서 곁눈질로 보던 대학 축제의 음주 폐해와 관련된 뉴스가 생각났다.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저리다. 선배가 후배에게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해 여러 사건이 생기니 술을 아예 못 팔게 하자던 말이 진짜로 실행된 모양이었다. 나라는 이렇게 대학생의 안녕을 생각해 주는데 대학생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준비로 편법 습득부터 하다니. 휴가 기간 내내 친구들이랑 술을 계속 마신 통에 뭘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곧 복귀니까 맥주 하나는 괜찮겠지. 제일 싼 오천 원짜리 콘치즈가 눈에 머문다.


“그럼 저 콘치즈 하나요.”

“네, 콘치즈 하나.”


 주문을 받은 여자애가 천막 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윽고 계산대로 보이는 하얀 임시 플라스틱 책상 옆에 있는 아이스 박스를 열어 덜그럭 거리며 맥주 한 캔을 꺼낸 뒤 내 테이블 위에 맥주를 올려놓으려던 찰나, 다시 맥주를 본인 뒷짐에 감춘다. 뭐지. 직접 따주는 건가?


“성인 맞아요? 요새 술 때문에 말 엄청 많았는데 모르시네. 민증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성인 맞아요. 제가 지금 군인 신분이라 소식이 좀 늦어요.”

“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술은 서비스로 줄 수 있으면서 민증 확인은 해야 한다니. 뭔가 순서가 이상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지금 맥주를 무르는 건 더 이상해 보일 일이다. 주머니 속 지갑에서 민증을 꺼내 여자애에게 보여줬다.


“자, 1999년생 맞죠? 사진도 제 얼굴 맞잖아요.”


 내 민증을 본 여자애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듯 입술이 뾰족하다. 사진이 별로인가? 민증 사진이 멋있고 이쁘게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여자애의 의문은 사진이 아니었다.


“남재훈?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갑자기 여자애가 고개를 뒤로 돌려 목소리를 높였다.


“지희야. 너 혹시 남재훈이라고 알아?”


까랑한 것 같은 여자 목소리가 천막을 거쳐 부드럽게 걸려 들려왔다.


“남재훈? 남재훈. 아! 걔잖아. 입학하자마자 휴학한 애. 군대 갔다던.”


여자애가 깜짝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너 혹시 문정과 18학번 남재훈이야?”

“네. 어, 맞아.”


 처음 본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순간 기분이 상해 존대로 답하다가 급하게 반말로 바꿔버렸다. 이러면 여자애도 금방 눈치를 챌 줄 알았더니만 오히려 신이 난 것 같다.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이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와. 군대 갔다더니 진짜구나! 반가워. 나 문정과 18학번 신혜리. 너랑 동갑이야.”

“어, 반갑다.”

“너 엄청 유명해. 너 때문에 우리 기합 받을 뻔했잖아. 전체 참석인데 안 왔다고. 군대 가면 가는 거지 오리엔테이션은 왜 안 온 거야?"

"난 그때 이미 군대였어."

"아, 미안. 선배들이 말 많았거든. 운 좋은 놈이라고. 사실 우리 과 이래 보여도 엄청 군기 세. 맨날 기록 정리나하고 있으니 그런 거라도 안 하면 심심한가 봐.”


혜리는 말이 많았다. 심심한 와중에 잘 됐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말이 많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혜리 앞에 있던 맥주를 내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해 여긴?"

"아까 선배 하나가 술 취해서 깽판 쳐놓은 바람에 사람들이 말린다고 가버린 뒤로 이래. 왜 그랬는지는 묻지 마. 나 왔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여기 계속 있던 거 아니었어?"

"신입생은 돌아가면서 일하는 거라. 나는 운이 좋지 뭐."


 모르긴 몰라도 내가 오기 전에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혜리가 살짝 지쳐 보이긴 한다. 혜리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서로 챙겨가며 술잔을 채우고, 바쁘게 주점을 운영하는 앳된 친구들, 동아리 유치에 열정적인 선배들. 그 모든 번잡함이 내 테이블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마치 파란색 천막에 붙은 도서분류번호를 통과하는 순간 모든 흥분이 사라지는 듯, 내 앞의 맥주 거품이 터지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내가 돌아올 곳임에도 이곳의 풋풋함과 왁자지껄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이상했다. 부대로 돌아가기까지 하루. 나의 성급함이 놓쳐버린 처음이라는 기쁨은 내가 쥐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있었다. 문득 팔 주변이 따뜻함이 느껴져 바라보니 테이블 위에 콘치즈가 지글거리고 있었다.


"뭐야. 언제 가져왔어?"

"불러도 못 듣더니만. 휴가 나온 거지? 하고 싶은 거 많을 텐데 여기까지 오고. 내가 선배들한테 얘기 잘해줄게."

"아냐,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민망해."

"하하하. 그래. 알겠어. 그럼 잘 쉬다 가."

"아까는 그렇게 말이 많더니 갑자기 왜 그래?"

"아냐, 내가 눈치가 없었어. 선배들 말이 군대에 있을 때는 휴가 나와서도 혼자 있기 어렵다더라. 네가 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저 뒤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


 혜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천막 뒤로 사라졌다. 혜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학교에 오기 직전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펼쳐볼 새도 없이 바로 군대 단체 생활에 구르는 통에 혼자 있는 시간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물론 선임들이 날 혼자 두지도 않았지만. 자대 배치를 받고 자기소개를 명목으로 이상한 장기 자랑을 시킬 때, 맞선임이 속옷 빨래를 시킬 때, 날라리 애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담배를 선임들이 억지로 내 입에 꽂을 때조차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학교에서 선생님 말을 들으면 학교 생활이 편한 것처럼 그렇게 선임들의 말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저 편하게 살고 싶어서. 김 빠진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금세 식어버린 콘치즈를 고무처럼 씹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분노가 밀려 올라왔다.


"위하여!"


 다른 주점에서 외치는 잔 부딪히는 남자 신입생들의 외침이 들렸다. 쟤들은 뭐가 즐겁다고 저리 술을 마셔댈까. 본인들도 곧 군대로 끌려갈 거면서. 군대에서 구르다 보면 쟤들도 결국 나랑 똑같아질 거다.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으면서 선택권만 있는 상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순전히 나를 위한 선택을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남아 있는 콘치즈를 놔두고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천막 틈새를 확 젖히자 혜리와 지희로 추정되는 여자애가 약간 큰 고무 대야에 설거지 거리를 잔뜩 쌓아놓고 있었다.


"쟤가 남재훈이야?"


지희의 질문에 혜리가 고개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잘 됐다. 너 안 바쁘면 나 좀 도와줘. 이거 본관 화장실 가서 설거지해야 하거든."


 이러려고 군대에서 그렇게 뺑이를 쳤을까. 무거워 보이는 대야를 번쩍 들었다. 혜리는 양손에 고무장갑, 수세미, 세제를 들고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1층 화장실에 갈 거야. 따라와."


본관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언덕이 심했다. 가는 내내 우리는 가쁜 숨을 내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혜리를 따라 들어선 본관은 조용했다. 학생들이 모두 축제를 즐기는지, 요란하던 잔디밭이 무색하게 형광등이 모두 켜져 있는데도 을씨년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어느 학교든 귀신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도 귀신이 살까? 그러다 앞서 걷던 혜리가 갑자기 멈춰 섰다. 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대야를 내려놓았다.


"여기야. 고마워. 이제 가도 돼. 좀 있음 다른 애들이 와서 같이 날라 줄 거야."

"여기 너무 조용한데. 같이 있어줘?"

"뭐? 하하하. 시간 낭비 하지 마. 이거 도와준 걸로 충분해."

"그럼 설거지 도와줄게. 나 잘해."


군대에서 매번 하던 식판 설거지가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그릇을 몇 개 챙긴 뒤 손을 뻗어 혜리가 들고 있던 수세미와 세제를 들고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이미 다른 애들이 여기서 설거지를 한바탕 한 듯 새하얀 세면대에 고추기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고 물이 바닥까지 흥건했다. 혜리도 설거지를 시작했는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와 물소리가 화상실을 넘어 본관을 가득 채웠다. 수세미 가득 하얀 거품이 접시에 흐른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미끄러운 게 안 없어진다.  


"이거 기름이 너무 안 닦이는데?"

"대충 해. 여기 찬물 밖에 안 나와. 잘 닦는 건 불가능해. 설거지했다는 거에 의의를 두는 거야."

"내가 먹은 콘치즈도 그랬어?"

"아니? 그건 그냥 종이 포일에 전자레인지로 돌린 거야."


 다시 달그락 거리는 소리뿐. 이대로 가다간 설거지만 하다 끝날 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 손을 멈추고 한 마디 내뱉었다.


"니 번호 줄 수 있어?"

"뭐라고?"

"너 번호 달라고."


혜리의 당황스러움이 적막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본관이 고요로 휩싸였다. 수세미 가득한 세제만 거품을 터트릴 뿐이다.


"내 번호는 왜?"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며. 나 가끔 너한테 전화해도 돼?"

"나 너 모르는데?"

"그럼 날 알아갈 기회를 줄게."

"뭐라고? 푸하하하하."


혜리가 웃는다. 내 장기자랑에 웃어대던 선임들의 웃음소리에 익숙해져버린 내 마음에 혜리의 웃음소리는 커다란 파동이 된다. 타일과 신발 고무 밑창이 마찰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혜리의 얼굴이 불쑥 남자 화장실로 튀어나왔다.


"너 진짜 웃기는 애구나?"


 혜리의 얼굴이 사라지더니 고무 대야가 끌리는 소리와 혜리 목소리가 남자 화장실에 울렸다.


"좋아. 저 설거지 다 해주면 내 번호 줄게. 나 설거지 무지 싫어하거든."


 



<어젯밤> 안녕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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