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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Mar 11. 2024

"엄마들은 다 잊아뿐다"

영화 《3일의 휴가》를 읽고

《3일의 휴가》는 2023년 12월에 개봉한 영화다. 감독은 육상효, 주연은 김해숙과 신민아 배우가 맡았다.      


이승으로의 휴가


‘휴가’하면 보통 직장, 군대에서의 휴가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 영화의 휴가는 저승에 살던 귀신이 이승으로 잠시 내려온 얘기다. 3년 전 죽은 엄마가 3일간 이승에 머물며 모녀간에 쌓인 갈등과 오해를 해소한다는 스토리. 영화에서 모녀의 관계는, 일상이 그렇듯, 애증이기 마련.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상당히 신파적이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되게 심심하다. 신파적 요소가 넘쳐나지만 딱히 크리넥스를 적실 타이밍을 찾기 어렵고, 코믹한 요소도 군데군데 넣어두었으나 빵 터지는 수준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딸이, 엄마가 떠난 엄마의 집에 와 요리하는 장면에선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고, 4명의 배우들이 일렬로 갈대밭을 걷는 장면은 뜬금없이 비틀즈의 횡단보도 씬이 생각나기도 했다. (난 이상하게 네 명이 일렬로 걷는 장면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비틀즈가 생각난다. 참 고약한 고정관념이다.)      



박복한 여성 서사


엄마 이름은 ‘박복자’. 박복자라... 지지리 박복한 자, 라고 해석하라는 얘긴가. 이름에 걸맞게 이 캐릭터는 한국 근대사를 살아낸 가난한 ‘여성’의 보편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가난한 집 맏딸, 아들이 아니기에 교육기회를 박탈당하고, 중학교 진학도 못한 채 어린 여공이 되었다가, 결혼했지만 남편은 부재하고, 딸 뒷바라지하느라 일생을 다 보내고 끝내는 지나가는 길손들을 위한 백반집을 운영하다 죽은 여성.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아오긴 했으나 ‘박복자’라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삶은 없고, 누군가의 딸, 누나, 어머니로만 살았던 가난한 여성 서사.     


 ‘진주’는 복자의 희생 덕에 미국 대학 교수까지 되었으나, 유독 복자에게 냉정하고 모진 캐릭터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엄마의 사랑이 필요할 시기에 자신을 돌봐주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엄마가 내놓은 엄마의 꽃같은 인생을 내가 대신 살고 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뭐 그런 얘기다.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을 반복하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결국 해피하게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는 결말.      


'기억'이라는 아이템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한 건 ‘기억’이라는 아이템이다. 영화는 서두에 “기억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연료”라고 정의한 다음, 중반에는 엄마와 딸이 서로에 대해 각각 다른 기억을 갖고 살아온 것을 보여준다. 딸은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고 기억하고, 엄마는 ‘니’를 꿈에라도 버린 적 없고, 다만 '니'가 나와는 “다른 인생”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고 절규한다.      


“엄마들은 다 잊아뿐다. 속상한 거, 서운한 거 다 잊아뿐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사는 게 부모 아이가. 그러니까 니도 다 잊아뿌러라. 알았나?”     



영화는 끝내 딸에 대한 ‘기억’을 잃더라도 딸을 살리겠다는 모성 승리로 마감한다. 저승 가이드가 갖고 있는 태블릿 PC 앨범에 있던 수많은 사진들이 하나씩 검은색으로 바뀌는, 기억이 하나씩 삭제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씬이다.      


기억과 망각


기억과 망각. 사는 데에 어떤 것이 더 필요할까. 나이 든 사람들은 자꾸 ‘라떼’를 외친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으니 할 얘기도 많을 게다. “나 때는 말야~” 하지만 그들의 젊은 날들이 그렇게 모두 다 행복했을까. 아닐 게다. 밤잠 설치고 울고 괴롭던 날들도 꽤 많았으리라. 그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옅고 바래져 견딜 만해지고, 때로는 고맙게 잊혀지기도 했을 터.       


어떤 기억은 쉽게 잊혀져 괴롭고, 어떤 것은 잊히지 않아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한때 반짝였던 어느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여행을 다녀오면 고생했던 기억은 금세 휘발되고 아름답고 행복했던 장면만 두고두고 환하게 기억되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그때 그 시절의 기억, 좋든 나쁘든 내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을 매만져 윤색하고 가공하며 살아간다.      


인생은 기억의 집적


인생은 기억의 집적이다. 기억이란 내가 살아온 날들의 징표이자, 살아갈 에너지다. 이처럼 기억은 삶이라는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군가가 건네준 아리아드네의 실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삭제한 ‘박복자’는 이제 저승에서 행복할까, 아니면 미궁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까....       



* 사진 : Daum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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