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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Oct 16. 2024

산책길

행복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날이 갑작스레 쌀쌀해진 요즘이다. 외출할 때마다 반팔을 입어야 할지, 긴팔을 입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가을은 지나쳐버리고 순식간에 겨울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인생에서 좋은 것들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봄과 가을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봄과 가을이 길었었고, 여름과 겨울은 덜 혹독했었는데, 지금은 여름과 겨울이 계절을 지배하고 있다. 좋은 계절은 점점 짧아지고, 나쁜 계절만 길어진다.

 오늘 아침에도 모기가 윙윙거렸다. 차라리 저 먼치에서 소리를 낸다면 모른 척 해줄 수 있겠다만은, 굳이 귀에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모기의 생리는 알다가도 모를바이다. 아침에 일어나 빨갛게 부어오른 피부를 보면 사소하게 열이 뻗는다.

 시간이 지날 수록 고통은 커지고, 기쁨은 줄어든다고 이야기한다. 나이를 먹어가는 동지들이 입 모아 얘기하는 소리이다. 나이를 먹으면 웃을 일이 적어진다고, 나이를 먹으면 예전만큼의 텐션이 나오지 않는다고, 그 때가 좋을 때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라는 건 언제인 것일까? 삶이 계속해서 고통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면, 그들의 '그때'는 지금일 것이다. 어차피 나빠지기만 할 인생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정말 나이를 먹으며 불행해지는 것일까? 나는 미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 내 앞가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청년일 뿐이다. 내 미래에 어떤 고행과 행운이 기다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20대의 중반을 넘은 지금, 10대와 비교해서 나의 행복을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사춘기를 겪으며 위로도, 옆으로도 성장하던 나는 행복하였는가? 아니다.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반복된다는 생각에 지긋지긋해 하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다가 결국 삶의 의미는 무의미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내가 떠오른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행복해졌다. 덜 불행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은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은 그때의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고는 한다. 우울과 무기력에 잠겨 아무 것도 하기 힘들어했던 과거가, 다시 나를 잠식할 때가 있다. 마치 영원과도 같은 무기력 속에서 나는 서글퍼한다. 내가 마치 변색되어버린 과일처럼 느껴진다.

 부모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미 우울증은 만성이니까, 달고 살아가면서 적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이미 내 단짝이 되어버린 무기력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제 나는 내 앞을 가리는 안개를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무기력의 늪에서 빠져나와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야 행복이 뭔지 알게 된 것만 같다.

 행복에 대해 논하자면, 행복에 관한 책에서 'becoming'과 'being'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떠오른다. 당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면, 좋은 대학에 갔거나,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면, 당신은 행복할까?

 당신은 아마 매우 행복해 할 것이다. 행복을 주체하지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한 턱 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행복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어느 순간에, 당신은 다시 예전의 기분을 느낄 것이다. 무엇이 '되었다고'해서 당신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무엇이 되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짝을 만나려 외모를 다듬고, 남들과 경쟁하며 스스로의 위치를 점검한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낸 과실은 곧 변색되어 버린다. 진열장 안에 넣어두고 가끔씩 떠올리는 영광으로만 남게 된다.

 성취의 기쁨은 무색하도록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결국은 사라지고야 만다. 그렇지만 걱정하지는 말라. 'becoming'과 'being'의 법칙은 고통에도 똑같이 적용되니 말이다.

 당신이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를 당했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얼마나 슬플 것이고, 인생이 부질없게 느껴질 것인가? 당신은 아마 울 것이고, 인생에 남은 희망은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신의 여생에도 볕은 내리쬔다. 당신이 어떤 병을 얻었든, 당신은 그 병에 적응한다. 처음에는 크게 보이던 나의 불행이, 작아지고, 사소해지고, 종국에는 사라진다. 불행도, 행복도 일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일까? 아마 이쯤에서 당신은 이 글을 쓰는 나의 의도를 의심할 수도 있다. 기다려보라. 나는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행복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에 있지 않다. 행복은 계속해서 되새기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햇빛이 좋아 기분이 좋았다. 오늘 점심에 먹었던 순대가 간이 적당해서 기분이 좋았다. 친구 A가 잘 되어서, 오늘도 내가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일은 운동, 명상과 비슷한 수준으로 당신의 행복도에 기여한다고 한다. 평소에 작은 호의에, 사소한 행운에, 친절한 친구와 오늘도 잘 살아온 자신에게 감사하라. 그런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 당신의 시간은 내리막길이 아니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오르막길도 아니다. 그저 여유롭게 걸으며 좋은 공기를 만끽하고 풍경을 감상하는, 산책길일 뿐이다.

 그러니 무엇이 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무엇이 되든, 당신은 당신으로 남을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현재의 삶에 고통을 계속 주면서, 미래에 무언가가 되려는 생각은 행복한 길은 아니다. 그저 인생을 즐겨라.

 물론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석가모니도 인생을 고통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인생을 즐기라고 이야기 하냐고 말이다. 물론 그 말에도 타당성은 있다.

 예전의 나를 다시 떠올리자면, 숨쉬는 것조차 힘들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숨쉴때마다 마치 작은 칼날이 내 폐로 들어오는 것 마냥 나는 모든 시간을 고통으로 여겼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다 고통이었다.

 나는 고통에 대해 고뇌했다. 고통을 곱씹어보았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노력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새로운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렇게 고통의 연속을 계속해서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인정했다. "그래, 차라리 이 고통을 누리자."

 인간은 태어나길 고통을 강하게 느끼게 태어났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예민하게 살아가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신경성이 높은 사람들은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당신이 지금 지고 있는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면. 몇 가지를 조언할 수 있다.

 첫째, 정신과에 가라. 정신과에 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정신병자라고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누구나 감기에 걸리듯 정신이 아플 때도 있는 것이고, 그럴 때는 약을 먹으면 된다. 나는 정신과 약을 통해 내가 겪는 일상적인 고통을 많이 줄였다.

 둘째, 잘 자라. 수면시간이 짧아지면 사람은 예민해진다. 지금 자기 아쉽다고 휴대폰만 쳐다보지 말고 내일을 위해 잘 자라. 당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다.

 셋째, 운동해라. 운동은 항우울제만큼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어떤 운동이라고 시도하라.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상태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당신의 인생을 침대 위에서만 허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 조언을 따르면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이 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당신의 크나큰 고통이 견딜만하게 작아질 것이다. 당신의 우울이 옅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고통을 누릴 준비가 된 것이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체리피킹하면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고통을 누려라. 배가 고프다면 그 상태를 자각하고 인정하라. 당신이 지금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지금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이 친절하게 알려준다고 인식하라. 그렇다면 고통이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슬픈 일이 있다면 온전히 그 슬픔을 받아들여라. 삶에 불행이 찾아왔다는 것은 인식하고, 그 슬픔을 인정하라. 그 슬픔이 자신이 겪는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인식하고, 고통을 누려라.

 당신의 고통은 당신을 괴롭히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일부이다. 너무 미워하지 말고, 오랜 벗처럼 대해주면, 고통을 껴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악화일로가 아니다. 우리는 늙을 것이고, 어딘가 아플 것이고, 친구 관계는 멀어지겠지만, 우리는 그에 적응할 것이다. 짧아진 봄과 가을에 적응하고, 기나긴 여름과 겨울에 적응할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미래를 걱정하면서 다가올 고통에 대해 두려워하면, 불행을 배가시킬 뿐이다.

 나쁜 것만 생각하면 나쁜 것만 보이기 마련이다. 좋은 것을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면 좋은 것만 볼 수 있다. 흠을 보지 말고 감사할 점을 보려고 하자. 벌레를 보지 말고 나무를 보려는 버릇을 기르자,

 인생이라는 산책길을 걷다보면 돌부리도 있고, 진흙길도 있을 것이다. 바닥만 보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행복하기 위해 걸어가라. 뛰지 말고, 자신을 혹사하지 말고, 주변을 감상하면서 여유있고, 자신있게 걸어가면 된다. 그렇다면 그 길이야말로 행복의 왕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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