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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May 19. 2024

우울증이 찾아올 때

어두운 묘사가 많으니 주의해서 읽어주세요

 죽고 싶다. 죽고 싶은데 왜 사는 걸까. 왜 살아가야만 하나.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혹은 명제를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일까.
 아등바등한다. 삶은 그 연속이다. 우물 밑으로 떨어진 이가 밧줄을 붙잡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 삶은 어둡고 침침하다. 축축하고 누린내가 난다. 삶은 깊은 공허로 메워져 있다. 공허는 가끔 나를 찾아온다. 나를 잠식한다. 나는 공허에 잠식당해 주변을 느낀다. 주변 풍경은 멀쩡하다. 나는 공허한데 모든 것이 그대로이다.
 나는 참아야한다. 나는 공허를 억누르고, 채워나가야 한다. 돈, 우정, 사랑 혹은 무엇이라도 나의 굶주린 공허에 던져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무한한 공허는 채워지지 않는다. 타르타로스에 던져진 타이탄들처럼, 내 감정들은 갇혀있다.
 나는 공허를 극복하고자 한다. 극복하려고 하는 마음이 든다. 소소하지만 확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일단 찬바람이 불고나면 의지는 날아간다. 불규칙의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굶주리게 된다. 수면에 굶주려 졸음이 내려온다. 음식에 굶주려 단 것을 찾는다. 성욕에 굶주려 자위행위를 한다.
 살이 쪘다. 머리가 멍하고 무겁다. 자주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울려고 노력한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벽을 마주한 것만 같다. 콘크리트로 지은 회색 벽, 나는 그 앞에 평생 앉아있다. 점점 살이 찌고, 공간을 차지하면서.
 나는 타인을 위해 살아간다. 타인이라 함은, 친구와 애인과 부모님을 포함한다.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죽고 싶은데, 부모님이 슬퍼할까봐 죽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어차피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가.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옷과 재산이면 충분한 것일까. 충분치 않다. 옷을 입어도 벌거벗은 것과 같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에 몸이 베인다. 겨울이 되면 몸이 아려와 팔짱을 낀다.
 나는 세상을 마주할 때마다 팔짱을 낀다. 방어하려고 그러는 것만 같다. 혹은 정말로 추워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리한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마주한다. 옷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한다. 애인도 나를 위로해주지 못한다. 부모님은 나에게 오히려 돌부리이다. 나는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사람이 두렵다. 사람들이 두려워서 주변을 둘러본다. 거인 사이에 둘러쌓인 소인이 된 것 같다.
 부모님은 왜 나를 내버려두었을까. 내가 괜찮아보였을리 없다.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믿어보려 노력했던 것일까.
어쩌면 회피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괜찮다니까. 친구 하나 없어보이지만, 다른 생각을 하면 잊혀지니까. 그들은 회피했을지도 모른다.
 전쟁터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으로 가야했고, 학원에서 돌아오면 집으로 가야했다. 각각의 장소마다 나는 방어태세를 취했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무심한 척, 고고한 척, 똑똑한 척하려 애를 썼다. 냉랭한 집의 분위기 안에서는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방 안에서 게임을 하고, 책을 보았다.
 2년 전 죽은 강아지 복돌이가 생각난다. 무심하지만 무던하진 못했던 복돌이의 성격이 생각난다. 내가 돌아올 때마다 그저 쳐다보기만 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그를 껴안으면 그는 부담스러워했다. 부담스럽고, 어색해하였다. 그는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했다. 나 또한 누구와도 진정으로 친해지지 못했다. 빌어먹을 공동체이다.
 그냥 눕고 싶다. 일단은 침대로, 종국에는 관으로 가서 눕고 싶다. 누워서 아무 생각도 안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영원한 어둠을 맛보고 싶다.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 것들이 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잔상이 있다. 잠들기 전까지 그들을 보고 살았다.
 지난한 인생이다. 지루하고도 벅차다. 한겨울의 방안처럼 춥고도 건조하다. 이불을 덮어도 건조한 공기는 얼굴에 와닿는다. 춥다. 밖은 항상 새벽이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비춰온다. 해는 뜨지 않는다, 영원히 잠겨 있을 뿐이다.
 지금껏 인생이 게임 캐릭터와 같다고 생각해왔다. 공을 들여 키워봤자 흥미가 떨어지면 삭제해버리는 캐릭터. 나는 그런 캐릭터에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흥미가 떨어진 차였다. 그렇지만 나는 공부했다. 아마 습관이 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다. 그들은 나를 매일같이 실망시켰고, 내 기대치는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말이다. 나는 사방이 두려워서 단정히 하고 다니려 하였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두려웠다. 욕먹고 싶지 않았다. 흘겨보는 눈이 무서웠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가고 있다. 빌어먹을 인생이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인생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너무나도 어두운 구덩이다. 나는 죽고 싶지만 시도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각을 가로막는 벽이 있다. 도무지 누가 벽을 지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러므로 열심히 살 수 밖에는 없다. 자격증을 따고, 정신없이 일하고, 땀흘려 운동해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은 없다. 심지어는 죽음조차 열망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그렇지만 열심히 살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영원히 쳇바퀴를 굴린다. 잔혹동화의 결말이다. 나는 그렇게 영원히 불행하게 살았다.


증상이 찾아와 무기력할 때 의식의 흐름으로 적은 글. 글을 적으면서 감정이 승화되어 괜찮아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환자의 기분이 어떤지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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