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며칠 전 이사 때문에 집 정리를 하다 ‘버킷 리스트 박스’를 발견했다. 어렸을 때부터 대단한 야망가였던 내가 15살,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이던 시절에 만든 것이었다. 어디선가 꿈은 생생하게 꾸는 것이 좋다는 말을 주워듣고 만들었던 그 상자 안에는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의 사진들이 담겨있었다. 사진마다 뒷 장에는 그것들의 정확한 명칭이 적혀있었다. 예를 들면 연세대학교 정문 사진 뒤편에 연세대학교 입학이라 쓰고 넣어두는 식이었다.
연세대학교는 그래도 제법 현실적인 축에 속했다. 그 상자 안에서 나온 건 이런 식이었다. 30살 내 집 마련 - 음, 나는 아직 엄마랑 같이 사는 캥거루족이다. 아우디 R8 - 아우디는 무슨, 살 돈도 없거니와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 아우디 로고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게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때 아우디 R8의 존재는 도대체 어떻게 알았던 거지? 발견한 것 중 제일 웃겼던 건 투피스 치마 정장을 입고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 사진 뒤에 ‘커리어우먼 되기'라고 써 둔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시야를 넓혀야 한다'라는 엄마의 교육 철학 하에 방학마다 서울살이를 했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광화문 교보문고였는데, 아마도 나는 그곳에서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꿈꾸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장을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때 본 그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멋있었나 보다. 제법 자아가 생길 때의 장래희망이 변호사, 의사와 같은 직업군으로 특정되지 않은 그저 예쁜 정장에 높은 구두를 신는 ‘커리어우먼'이었던 것을 보면.
일단 커리어를 가진 우먼은 되었다. 첫 직장은 동종 업계 내에서도 보수적인 편에 속했는데, 때문에 아주 엄격한 복장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라도 회사에 고객사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으니 매일 정장과 구두를 갖추고 출근해야 했다. 입사 직전만 해도 나는 커리어우먼이 될 생각에 설렜다. 계절별로 입을 정장을 두 벌씩 구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것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각 잡힌 치마 정장을 입고 새벽 2시까지 일하다 보면 배에는 가스가 차고 종아리는 땡땡 부어올랐다. 거기다 운동화만 신던 나에게 출근 지옥철 안에서 높은 구두를 신고 버티는 것은 거의 곡예 수준이었기 때문에 슬리퍼를 신고 출근해 회사 건물 앞에서 구두로 갈아 신는 게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크게 잘못된 거다. 그러니까 몸을 조이는 정장이 불편해서 10분마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발이 아파서 슬리퍼를 신고 출근하는 건 내가 생각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이 아닌 거다.
그것뿐인가?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볼 겨를도 없는 거울을 화장실에서 볼 때마다, 거기에 비치는 내 몰골이 아무리 잘 봐줘도 커리어우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직장에서의 업무 강도는 살인적이었다. 오후 10시에 퇴근하면 ‘와, 오늘은 칼퇴구나’했고, 자정 즈음에 퇴근하면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며 퇴근해도 출근 시간은 어김없이 아침 9시였다. 그러니 제때 미용실 못 가는 건 기본이고, 아침마다 머리 말릴 시간도 부족해서 부스스한 머리로 집을 나섰다. 화장할 시간에 잠이나 자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면 시간 탓에 선크림만 겨우 바른 얼굴은 커리어우먼은 커녕, 대학교 졸업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오죽하면 출근하는 나를 본 엄마가 “회사 그렇게 가도 되니?” 라고 물었을 정도니까. 아마 엄마는 ‘그런 꼴'을 ‘그렇게'라고 순화했던 것 같다. 그때 그 회사에 여성 직원이 나를 포함해 채 5명이 되지 않았는데 모두가 나와 비슷한 꼴이었다. 당연하지. 우리는 함께 회사에서 밤을 지내는 사이였으니까.
나보다, 그때 나와 함께 일하던 여성 동료들 모두보다 더 부지런한, 어린 시절의 내가 꿈꾸던 커리어우먼도 당연히 없지는 않겠지. 어딘가에는 있겠지.
결코 아니다. 비록 내가 꿈꾸던 모습은 아니지만 아주 견고한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 우먼이 되었다. 슬리퍼를 신고 출근한 덕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달려갈 수 있었고, 립밤도 제대로 바르지 못한 날에도 커뮤니케이션은 제대로 했다. 머리카락은 빗질 한 번 못 했지만, 출근해서부터 퇴근하기까지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머리는 풀가동 상태였다. 이런 내가 커리어우먼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커리어우먼이란 말인가.
세상에는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부지런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에는 부지런한 커리어우먼이 너무도 많다. 오히려 커리어우먼일수록 자신을 가꾸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쉽다. 그러니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모든 여성을 커리어 우먼이라고 하자. 우리를 보고 자랄 또 다른 15살 여자아이가 뾰족구두와 핏한 정장 대신 “진짜 커리어”를 꿈꿀 수 있도록.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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