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그 전까지는 곳곳에 언니들이 있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그리고 그 이후까지. 주변에 멋있는 언니들이 한 가득이어서, 언니 콜렉터를 자처했던 나인데 말이다.
고등학교 동아리 선배였던 H 언니는 갓 수능을 친 나에게 자신의 인생 책이라며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선물해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책인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읽으니까 또 느낌이 다르더라고. 읽으면 많은 생각이 들 거야.”
H 언니가 생각날 때마다 책을 펼쳐 읽고는 했는데,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가 되어서야 나는 언니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읽을 때는 그저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 책이었는데, 다시 읽을 때마다 변해가는 나의 가치관을 일깨워주었다.
첫 인턴을 경험했던 회사의 팀 막내인 J 언니는 내 인턴 기간이 끝나기 이틀 전, 나에게 따로 밥을 사주며
“앞으로 어떤 곳에서 일하게 되던, 꼭 명심했으면 좋겠어서.”
언니가 내민 책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절대 회사를 믿어서는 안된다.’
열정에 불타올라 회사에서 시키면 뭐든지 ‘오케이’ 했던 내가 걱정되었던 것일까? 그 책에는 휴가 제도, 연봉 협상 같은 안건들에 대해 회사와 밀당하는 법 같은 것들이 나와 있었는데, 언니 덕분에 사회 초년생 때부터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대학생이 되어 학교로 찾아오는 언니들을 보며 대학생활을 엿봤고, 대학생 시절에는 학교를 떠나 회사로, 대학원으로, 누구는 해외로 가는 언니들을 보며, 내게도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언니들처럼 학교를 떠나 직장인이 되었을 때, 언니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내가 따르던 언니들은 새로운 직장에서 다른 누군가의 언니가 되기도,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연말연초 안부 인사를 전할 때마다 변함없이 반가웠지만,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컨설턴트가 되어 이 일이 천직이라고 확신하던 나에게는 이곳에서의 미래를 비추어볼 새로운 언니가 필요했다. 컨설팅 회사에서의 팀장이나,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그런 언니 말이다.
입사 1개월 차에는 회사 전체를 통틀어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선배들이 3명 (10%도 안 된다) 있었지만, 입사 2개월 차, 3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그 수가 빠르게 줄어 입사 6개월 차에는 한 명의 언니만 남았다.
회사는 일하는 곳인데 언니의 존재 여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나도 몰랐다.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그렇게 남자들만 많은 곳에서 일하기 힘들지 않겠어?”
입사 초기, 엄마의 걱정에 일하는데 남자 여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며 쓸데 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나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언니가 필요한 순간들이 너무도 많았다.
생리휴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리던 날, 대충 몸살 감기라고 둘러대고 조퇴를 했다. 그 날이야 하루 조퇴로 어떻게 무마했다지만, 결혼을 하면? 임신이라도 하면? 출산 휴가는? 육아 휴직은? 당시 회사에서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사용한 사람은 0명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함께 일할 언니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회사에서의 미래를 투영해볼 대상조차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의 3년 후, 5년 후, 10년 후를 그려볼 수 있는 자리에 언니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힘들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일하고 내 자리를 지킬 수 있겠구나’ 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안타깝게도 나의 회사 롤모델은 모두 미혼의 남자 상사, 혹은 결혼했지만 출산 계획이 없는 남자 상사였기에 업무 역량은 잘 배울 수 있어도, 딱 거기까지였다.
함께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데도 회사 안팎의 고민거리를 편하게 이야기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일이 바빠 서운해하는 남자친구와의 다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혼을 하면 도대체 어떤 것들이 바뀌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물론 대단한 차별을 받거나 엄청난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승진 심사에서 밀린 적도 없고, 좋은 자리가 생겼을 때 남자 동기가 아닌 나부터 불러준 선배들도 많다. 하지만 회사 안팎에서 선배들을 ‘형’이라고 부르며 시시콜콜한 대화와 고민을 주고받는 남자 동기들과, ‘팀장님', ‘상무님', 혹은 ‘파트너님'이라 부르는 나와의 간극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도 분명 거기에 존재했다. 그것이 회사 내 주류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는 큰 소외감으로 다가왔으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또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 새로운 언니를 만들 수 없다면 내가 누군가의 언니가 되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OO님’ 하고 부르지 않아도 ‘언니' 한 마디면 달려가서 일에 대한 고충도, 고민도 다 이야기 할 수 있는 언니.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어도‘난 그럴 때 이렇게 해서 도움이 좀 됐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언니.
그래서 갓 입사한 여자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 커피를 사주고, 잘하고 있다며 토닥여 주고, 별일이 없어도 먼저 연락해 힘든 것은 없냐고 물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어떤 조직에서든 오래오래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일하면서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인생의 여러 전환점을 지나쳐 일과 인생의 균형을 저렇게 유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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