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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Feb 19. 2024

12.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당신은 리더형 인재인가요? 팔로워형 인재인가요?’


생애 첫 인턴 생활을 경험했던 회사의 지원서 항목 중 하나였다. 다른 질문들은 비교적 쉽게 써내려간 반면, 이 질문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다.


회사라면 어떤 인재를 원할까?

자발적으로 일하는 리더형 인재를 안 좋아할 곳이 있을까?

아니지, 팔로워십이 아닌 리더십이 더 큰 인턴이라면 그것도 곤란하지 않을까?


팔로워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위너’의 인상을 주는 리더와 수동적 인상을 주는 팔로워, 둘 중에서 회사가 원하는 인재는 어떤 쪽일까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렸을 때는 골목대장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만날 시간을 정하는 것은 항상 내 몫이었다. 한참을 놀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친구들을 줄줄이 달고 돌아와서는, 집에 있던 요구르트와 짜요짜요를 나눠주었고 친구들은 줄을 서서 하나씩 받아갔다. 듣도 보도 못한 놀이를 개발해서 온 동네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사람을 모으고,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감투 쓰는 일은 다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는 성향 때문이다. 리더가 되면 부담감, 책임감에 괴로울 정도로 시달릴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반장, 회장, 동아리장 등을 뽑을 때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가 되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 대학교 학회 활동 시절, 모두가 돌아가며 팀장을 맡아야 하는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팀 리더를 담당하게 되었다. 팀원 역할을 해준 한 후배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언니, 나 그때 사실 진짜 힘들었어. 울 뻔 했다고.’라고 말해 많이 자책했다. 지나친 책임감 때문에 다른 이들까지 몰아붙였던 것 같아서.


그래서 리더 말고 팔로워, 서포터, 조력자가 되기를 원했다. 리더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든든한 아군. 고민하던 인턴 지원서에도 ‘저는 팔로워형 인재입니다'라고 써냈다. 인턴에게 기대하는 바가 리더십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한 것인지, 진정성 있는 답변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합격했다.


컨설팅을 시작한 후에는 팔로워임을 확신했다. 멀리서 보면 수평적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직적 조직 그 자체인 컨설팅 회사에서 나는 완벽한 팔로워가 되어갔다. 다년간의 팔로워로서 감히 말하건대, 팔로워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맷집이다. 이리저리 치이고 여기저기 깨져도 흔들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해나가는 맷집. 원래도 맷집이 튼튼한 나는 회사에서 수천 번을 깨지고 일어서면서 점점 단단해졌다.


그러나 한 조직에 종속된 일원으로서 계속 성장하고자 한다면, 좋든 싫든 언젠가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한다면 리더가 되지 않으면서  실무를 계속할 수 있는 업계도 있다지만, 컨설팅은 아니었다. 여전히 리더의 자리는 부담스러웠으나, 이 일을 오래하고 싶었기에 자연스럽게 ‘어떠한 리더가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컨설팅은 이런 고민을 하기에 적격의 장소였다. 프로젝트마다 다른 팀장, 다른 팀원과 일하며 그 답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리더 A는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자료를 들고가도 잘한다, 잘한다 박수 쳐서 나를 춤 추게 했던 분. 하지만 프로젝트 막바지에 모든 걸 뒤엎어야 했고, 뜯어보니 사실은 형편없는 결과물을 수정하느라 모두가 3일 밤을 꼬박 새야 했다. 고객사의 추가 요청도 거절하지 못해 팀원들을 밤낮으로 붙잡아뒀으니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반대로 당근 없이 채찍질만 해대던 리더 B도 있었다. 이제는 5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열심히 지시한 업무를 작업해서 가져갔을 때 들은 말을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이걸 보고서라고 그려왔어?”

“이걸 고객사한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

“이런 구조는 우리 회사에서 본 적이 없어, 내가.”

맷집이 세다고 생각했던 나마저 슬슬 화가 났다. 더 완벽하게 해내서 칭찬을 받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뭐가 문제였는지, 그 이후에도 열다섯 번쯤 퇴짜를 맞았고 오후 1시에 시작한 업무는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밤을 꼬박 새서 일했으나, 결국 최종 보고서에는 제일 처음 제출했던 버전이 들어가 있었다. 새벽까지 혼자 사무실에 남아 같은 보고서를 서른 번 넘게 수정했던 그날 밤,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결과물이 아닌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비아냥으로 혼내는 것도, 정확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다시 해오라고 말하는 것도 ‘좋은 리더'의 자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들이 그저 나쁜 리더였던 것은 또 아니었다. 리더 A는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는 팀원들을 토닥여 끝까지 챙겨가는 사람이었다. ‘잘한다 잘한다’하는 말로 팀원들을 춤추게 했다. 덕분에 신입사원들이 선호하는 리더였다. 반면 리더 B는 정신적으로는 팀원들을 괴롭혔으나, 항상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팀원들도 덩달아 최상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상적인 리더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당근과 채찍의 균형을 맞는 것, 1분 1초가 바쁜 상황에서 정확한 피드백을 주는 것,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인지 머리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이 모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과연 나는 리더 A, 리더 B처럼 하나라도 잘 해낼 수 있는가? 이 상태로 이도저도 아닌 리더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런 고민이 한창일 때, 나의 롤모델 중 한 명이었던 상사가 지나가듯 한 말이 아직도 나를 벅차게 한다.


“넌 어떻게든 해낼 거야. 자리가 사람을 만들거든.”


내겐 마법 같은 말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여전히 나는 팔로워의 자리가 편하고, 리더로서 나의 역량에 대해 의구심이 들지만, 리더 역할을 해야 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난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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