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2019년, 취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때 무라타 사야카의 책 <편의점 인간>을 읽었다. 주인공 게이코는 18년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살면서 오고 가는 여러 명의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점장들을 맞이하지만, 정작 자신은 집과 편의점만을 오가며 ‘편의점 인간'이 되어간다. 모든 일상이 그녀의 일터인 편의점으로 채워진 것이다.
이 책은 제대로 된 직장을 찾지 않고,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 일본의 청년층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과 정해진 사회의 규격에 맞추어야 하는 청년층의 압박을 다룬 소설이지만, 게이코에게서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인생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교를, 대학교 때는 좋은 직장을 열망하는 ‘학교인간'이었던 나. 지금은 모든 일상이 회사와 일로 채워진 ‘회사인간’이 되어버린 나. 일주일 동안 수면 시간이 채 30시간이 되지 않고, 친구와의 만남은커녕 같이 사는 엄마와 식사도 하기 어려웠던 나.
누구도 나를 ‘회사인간'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회사인간'이라 명명한 이후로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젊고, 건강한 지금이야 회사인간일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회사인간일 수 있는가? 언제까지 회사인간이어야만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라도 원할 때 언제든 회사 딱지를 떼고도 설명이 가능한 인간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고 있다. 어리석은 방향 설정이었다. 회사인간에서 벗어나려면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되면 회사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일 열심히 하는 회사인간이 될 뿐이었다.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나의 회사는 언제든 사람을 교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자리잡혀 있었고, 내가 열심히 하고자 했던 일들은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또 다른 노동일 뿐이었다.
두 번째로, 취미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정이 넘어 퇴근하고서도 새벽에 일어나 헬스장에 갔다. 주말에도 헬스장에 출석하는 탓에 헬스 트레이너로 착각받는 경우도 있었다. 운동 외에도 책 100권 읽기 목표를 정해두고 대학생 시절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적어도 하루에 100페이지는 읽어야 1년에 100권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기계처럼 읽었다. 주로 출퇴근 지하철과 자기 전 시간을 이용했다. 이 방법은 유용했고, 행복했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회사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시니어에서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회사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시간들이 침범당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운동은커녕 밥 먹을 시간도 없어졌고, 집에 오면 책을 펴도 머리 속에는 일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전처럼 취미를 즐길 수 없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상황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야를 줬다. 2019년부터 노트를 옮겨 가며 써온 일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5일 연속으로 ‘4시 3분, 퇴근했다.’, ‘3시 56분, 퇴근했다.’ 같은 글만 적혀 있는 장도 있고, 감기 몸살로 너무 아픈데 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욕이 잔뜩 적힌 장도 있고, 이 일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과거를 돌이켜보며 합리화하는 장도 있다. ‘일기장’이라 이름 붙이긴 했으나 일 이야기밖에 없기 때문에 ‘업무 일지’라 불러도 무방하다. 맞다. 회사인간을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글 속에서조차 회사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쓸 수도 없을 만큼 지쳤을 무렵, 글을 들춰보고는 좌절했다. 5년 동안 해온 고민은 해결되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일을 많이 하고, 보수를 많이 받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회사인간을 벗어날 자유란 없는 것일까?
회사인간이 아닌 인생을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15년지기 친구 K. K 역시 2주에 한 번 주 6일 출근하는 삶을 살면서도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나, ‘더는 고구마를 캐고 싶지 않다'며 사직서를 썼다. K는 자신을 고구마 캐는 소작농이라고 불렀다.
“내가 회사인간이 되는 건, 소작농한테 지주가 ‘매일 고구마 10개를 캐서 갖다 바치렴' 했는데, 소작농이 열정에 불타올라서 ‘오늘은 20개를 캐보겠어!’ 다짐하고 20개를 갖다 바치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닐까? 그러면 지주는 ‘이게 되네?’라고 생각하면서 ‘너는 내일 25개를 캐렴’이라고 하는 거지. 나는 욕하면서도 다음 날 또 25개를 캐 갈 거야. 열심히 하고, 잘하고 싶으니까. 그것 뿐일까? 옆에 다른 소작농이 5개밖에 못 캐고 있으면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것까지 5개 더 캐주는 거야. 왜? 나는 열심히 하는 게 즐겁고, 잘 하면 재밌으니까. 그렇게 고구마비우스의 띠에 갇혀서 회사 인간이 되는 거야.”
K는 그렇게 고구마를 던지며 회사 인간에서 벗어났다. K는 말했다. 자부심이 있었던 직업의 타이틀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우나, 회사 인간이 아니게 된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회사 동료로 만났다가 먼저 업계를 떠난 J를 1년 만에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처음엔 조금 두려웠던 것 같아. 그동안 ‘그 회사에 다니는 나’라는 타이틀 덕분에 덕을 많이 본 것도 사실이니까. 그 타이틀이 없어지면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아니더라고. 이제는 그 때의 내가 우습고, 좀 귀엽지.”
K와 J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를 회사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시스템도, 외부의 압력도 아니라 바로 내면의 욕심이라는 것을. 나의 직업, 나의 회사를 나와 동일시하며 그것을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 전전긍긍했다. 양 손에 이미 하나씩 들고 있는 공을 잘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도, 관계도 챙기고 싶어 자꾸만 여러 개의 공을 들고 저글링하려 했다. 완벽한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주어진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스스로 회사인간이라 규정하며 불행하게 만들었다.
회사인간으로 남지 않으려면 욕심을 버리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일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이 놓치게 되는 것들을 아쉬워하는 대신 그 길에 집중하면 된다. 양자택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모든 것을 해내려는 욕심을 버리고 일도, 취미도, 관계도 유지할 수 있는 균형을 찾으면 된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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