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티나무 Jan 30.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김소월, ‘산유화(山有花)’

쉬운 시 어려운 해설, 쉽게 감상하기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그와 같은 산에 피어 있는 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는 제2연의 내용과, 바로 그러한 꽃이 좋아서 산 속의 작은 새가 꽃과 어울려 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제3연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두 연의 내용으로부터 처음도 끝도 없는 거대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탈속의 존재가 되어 우주 혹은 자연과 함께 어울려 있는 꽃과 새의 모습을 만난다. ···

- 권영민, ‘한국문학대사전’ -


매우 쉬운 시어, 간단한 구조와 소재, 리듬을 가진 작품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만큼 여러 사람의 여러 해석을 달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해석이 여러 가지로 갈리는 것은, 주로 '꽃'과 '새'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 1-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만,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 (인간과 자연과의 거리)

오지 탐험이나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과 같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꿈꾸었다고 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아마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 옮겼다 하더라도 한 달 이상을 버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는 문명 자체가 이미 동물들의 자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며칠 간 자연 속을 여행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연의 주변을 맴도는 정도일 것입니다.

첫 번째의 해석은, 바로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거리'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작은 새'로 상징화된 시적 자아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꽃'의 상태가 '좋아' 그런 자연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문명을 버릴 수 없는 우리처럼, 시적 자아도 진정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거리가 '저만치'이고 그 안타까움이 '울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울며' '산에서 사는' 정도의 몸짓만을 보일 뿐인 것입니다. 자연과 합쳐 하나가 될 수 없는 화자의 안타까움 속에서도, 꽃(자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고 지면서 자기들의 존재 방식을 지속시켜 나갑니다.(1연, 4연). 


이 해설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바로 ‘혼자서’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거리’가 아니라, 꽃과 꽃, 즉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입니다. 서로 간에 거리가 존재하는 자연이라면, 그 자연이 과연 동경하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인 것입니다.


* 2-존재의 본질적 고독

인생에서 모든 궁극적 판단과 결정, 그 수행,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일시적이며 피상적인 동반자일 뿐입니다. 결국 인간은 혼자 태어나 혼자 살아가다가 혼자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의 해석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노래한 작품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이 해석에서는 '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징입니다. '저만치'는 일상적 삶의 모습과 존재의 본질적 모습 사이의 거리이고, 존재의 본질적 모습은 '혼자서', 곧 '고독'입니다. 첫 번째 해석의 '혼자서'의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됩니다.

'새'는 또 다른 존재의 모습입니다. 이 '새'는 '꽃'을 좋아하지만, 그 '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외로운 존재이기에, '새' 또한 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래서 모두 고독하게 나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고독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1,4연)

학원 강사들의 블로그를 보니 대부분은 이 해석을 택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해설에도 의문이 있습니다. '본질적 고독'은 존재의 비극적 숙명일 뿐, 자기가 선택한 존재의 양상이 아닙니다. 그런 비극적 숙명이 '좋아' 보인다면, '산에서' '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새' 자신도 '본질적 고독'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본질적으로 고독'한데 구태여 남의 '본질적 고독'이 '좋아' 찾아갔다가 다시 고독을 절감하여 ‘울게’ 되다니요.


* 3-대자적(對自的) 삶을 벗어나 즉자적(卽自的) 삶을 살고 싶은 마음

우리는 남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 관계를 위해서 해야만 하고, 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 관계 때문에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남과의 관계를 떠나 홀로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대자적 자아(對自的 自我), 남과의 관계를 떠나 홀로 존재하는 모습을 즉자적 자아(卽自的 自我)라고 합니다.

세 번째의 해석은 바로 남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대자적 자아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모습, 즉 즉자적 자아를 동경하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꽃'은 즉자적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떠나 '저만치'에서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단절한 채 '혼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꽃은 이런 즉자적 삶의 모습을 상징하기에 가장 적절한 소재입니다. 꽃은 제자리에서 자기 혼자 생존을 영위할 뿐, 동물들처럼 서로 간에 관계를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는 대자적 자아의 모습입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다른 새나 짐승, 식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고 당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새'는 즉자적 삶의 모습 곧 꽃의 상태가 '좋아' ‘울며’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 부러운 즉자적 삶의 모습을 온전히 소유한 채, '꽃'은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1,4연)

위 권영민 교수가 말한 ‘탈속의 존재’가 여기에 해당할 듯합니다.


위 해석들에 내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여러 해석들을 읽고 정리해서 대표적이라 여겨지는 것 세 개를 골라, 가능하면 쉽게 풀이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시 다시 읽기> 황인숙 ‘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