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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Feb 01.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황동규, 기항지(寄港地) I

- 남자가 반쯤 탄 담배를 꺼 버릴 때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항구에서 화자는 우울한 마음으로 밤 풍경을 바라보며 서 있다. 화자의 막막한 심정은 '구겨 넣고', '꺼 버리고'와 같은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다. ··· 멀리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지친 항해를 끝내고 항구로 돌아와서 편안히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 화자는 자신도 오랜 방랑을 끝내고 정박 중인 배처럼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majikim/98542573 -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젊은 날의 우울과 번민, 방랑의 욕구를 참 담담한 어조로 쉽고 깔끔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이 시의 해설을 검색해 보고 좀 당황했습니다. 육지는 정착, 바다는 방랑, 배는 방랑과 정착 사이의 갈등, ‘지전을 구겨 넣고, 담배를 꺼 버리고’는 소멸의 이미지 등등···. 나로서는 이해도, 앞뒤의 연결도 잘 되지 않는 어려운 해설입니다. 이 시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색해 본 모든 해설들이 한결 같이 그런 것을 보면, 아마 어떤 책을 그대로 옮긴 듯합니다. 


문득 사야 할 것이 생각난 사람은 보통 주머니를 먼저 뒤집니다. 돈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행동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돈을 주머니에 넣고, 사야 할 곳으로 갑니다. ‘지전(紙錢. 화폐)’은 구겨집니다.

담배를 피워 보았거나, 영화, 드라마를 웬만큼 본 사람은, 반쯤 남은 담배를 꺼 버리는 행위 다음의 장면을 기억합니다. 생각했던 일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죠.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을, ‘소멸의 이미지’란 멋지고 어려운 말로 해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해설이 놓치고 있지만, ‘도착’은 목적한 곳에 왔다는 말입니다. 항구에 온 목적이라면 배를 타는 일일 것입니다. 어둠이 깔린 항구는 곧 긴 눈이 올 듯한 추운 날씨이고, 불빛마저 희미한 집들은 스산해 보입니다. 화자의 어두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이곳은, 머물려고 한 곳도, 머물고 싶지도 않은 곳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려 합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확인해 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습니다. 가자. 아직 다 태우지 않은 담배를 꺼 버리고 조용히 선착장을 향합니다. 마을의 희미한 불빛으로 생겼던 그림자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불이 꺼진 모든 배들은 항구를 향해 서 있습니다. 오늘은 운항이 끝났습니다.

‘내일 떠나야겠다.’ 새로운 곳을 찾아 방랑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아는 듯이, 이제 내리기 시작한 눈 송이를 따라 하늘의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황인숙 시인의 ‘강’에 있었던 시구 ‘심장의 벌레’처럼, 내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 있어야 좋은 시이고, 그것은 고도의 상징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은 듯합니다. 그래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행동을, 고도의 상징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해설이 많은가 봅니다. ‘지전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그냥 돈의 액수을 확인하고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은 행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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