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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수 Feb 04.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

저항시는 의지적일 것이라는 고정관념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1연과 11연은 통사론적으로 대응된다. 곧 1연은 질문하고 11연은 대답하는 형식으로 읽을 수 있다. ···

- 이승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구조 분석> -

     

빼았긴 땅에도 봄이 오는가?”(1)

이제 들을 빼앗겨 곧 봄까지 빼앗기겠네.”(11)

나는 아무리 읽어도이 연결이 질문과 대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물음표와 관계없이 1연은 질문이 아니라, ‘빼앗긴 땅인데도 봄이 오다니!’라는 의미의 탄식이기 때문입니다여기에다 11연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탄식까지도, ‘국토회복의 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문덕수, ‘한국현대시 작품론’)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을 보면의아한 마음이 듭니다그런데 이게 일반적 감상입니다

저항시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고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으면 훌륭한 시가 아니라는 선입관이 작용한 까닭일 듯합니다.

     

1연 빼앗긴 땅에 찾아온 봄에 대한 탄식

강제로 빼앗긴 복권이 수십 억 원에 당첨되었다고 했을 때빼앗긴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빼앗긴 복권이 당첨된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까요차원은 다르지만 그 일처럼아름다운 봄이 이 빼앗겨 버린 땅에 찾아와 버린 것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바로 그러한 사태에 대한 탄식과 원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2,3연 봄의 들판으로 이끌림

그렇더라도 따뜻한 봄 햇살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새싹들의 싱그러움은 여전히 화자를 사로잡습니다무의식적으로 가리마처럼 곧게 뻗은 논길에 들어섭니다마치 꿈 속에서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에 '꿈 속을 가듯'인 것입니다.

화자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그 땅을 걷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과 들을 향해 묻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가너희가 나를 이끈 것은 아닌가?'라고. ('혼자'는 '끌다부르다'와 관련지어 볼 때, '홀로'가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내 의지로의 뜻으로 보입니다.)

4,5,6연 싱그러운 봄의 아름다움에 취함

앞부분의 회의는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아름다운 봄 들판에 한껏 매혹된 화자는, '빼앗긴 들'이라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걸음을 재촉하듯 명랑하게 부는 바람은 화자의 옷자락을 흔들고지난 밤 비에 먼지를 씻어 내린 푸른 보리는 금방 머리를 감은 듯한 모습으로 화자의 머리조차 상쾌하게 만듭니다. ('삼단'은 옷감 마의 재료가 되는 삼나무 줄기를 묶은 단길고 풍성한 모습의 표현입니다.)

봄의 아름다움에 취한 화자가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 숨이 가쁘게 걸어가야겠다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가쁘게나'의 '()'는 '밥이나 먹자'에서와 같이 선택의 뜻을 갖는 보조사입니다그러므로 '가쁘게나 가자.'는 '자신의 걸음을 가쁘게 걷는 쪽으로 선택해야 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가쁜 화자의 발걸음 곁으로졸졸거리는 도랑물이 메말랐던 논을 촉촉이 적시면서 경쾌하게 흘러갑니다.

7,8연 겨레땅과 일체가 되기를 희구함

싱그러운 봄의 아름다움 속에서 화자의 도취는 한층 깊어집니다다시 찾아와 까불대며 날고 있는 나비와 제비소박하면서도 정겹게 다시 피어난 민들레(맨드라미)와 들매꽃(들마꽃)을 보면서이 땅에서 김(지심)을 매는 사람들도 다시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아주까리 기름'으로 머리를 단장한 그들이 이 땅에서 농사를 짓던 우리 백성들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화자는 그들과 어울려 다시 이 땅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호미를 다오'라는 외침은 바로 그런 마음의 표현입니다어머니의 '살진 젖가슴'과 같이 늘 평온하고 풍요로웠던 이 땅에서의 노동이라면발목이 아프도록 땀을 흘리는 것조차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9,10연 잠시 현실을 망각했던 자신에 대한 비웃음과 감정적 방황

4-8연에서 봄 들판의 아름다움에 취해 옛날의 삶을 그리워하던 화자가문득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꿈인가를 깨닫게 됩니다형편()을 잠시 잊고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철없이 뛰어다녔던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화자가 '찾는옛날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현실을 잊었던 자신의 생각()을 비웃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봄의 풀내음이 옷속에까지 스며들 듯한 들판을웃고 울면서 걷습니다. '푸른 웃음푸른 설움'이라는 표현에서, '푸른'은 이런 '봄빛의 들판', '웃음'은 그 '봄 들판의 아름다움과 행복했던 옛날의 회상에서 오는 행복감', '설움'은 그 '봄의 들판과 삶을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을 표현합니다. '다리를 절며'이렇게 행복감과 슬픔이 복합적으로 움직이는 화자 내면의 감정적 불안정 상태를 표현해 줍니다그리고 화자는 그런 상태 속에서도 계속 들을 걷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봄 귀신(신령)이 씌운(지핀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0연 – 현실 인식에서 오는 절망적 탄식

그리고 또 화자는 생각합니다이처럼 아름다운 봄에서 느끼는 행복감도 결국은 빼앗긴 국토 생각에 설움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봄이 왔다고 해서 즐거워할 일은 아니라고.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마지막 행은 바로 이러한 절망감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시에는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나 신념이 보이지 않습니다아니 의지나 신념은 고사하고 염원조차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저항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이처럼 애절하게 표현한 것만으로도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 되기 때문입니다오히려 독립지사의 굳은 의지가 아니라서 더 감동적일 수도 있습니다무너질 것 같지 않은 1926년 일제의 통치 앞에서잃어버린 조국을 찾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행동으로 저항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그렇기에 독립지사가 훌륭한 것이고평범한 사람들의 무력한 설움절망감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현실적이며 감동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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