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티나무 Apr 15.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박인환, '목마와 숙녀'

전문 해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라디오에서 처음 이 시를 접했던 1970년대가 아련히 떠오른다. 회한에 찬, 어딘지 퇴폐적 감성이 느껴지는 시어들이 가수 박인희의 감성적인 목소리에 실려 낭송되는 시를 들으며 생의 쓸쓸함에 가슴 시렸었다. 술 한 모금 마실 줄 모르고 마신 적 없는 십대들에게 취기를 느끼게 하고 가르쳐준 ‘목마와 숙녀’. 시인 박인환은 사흘간 술을 마신 끝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서른 살에. 너무 젊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낭만과 센티멘털리즘은 젊음에 어울리는 의상이다. 그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젊은 시인, 도시 서정의 기수로 새겨져 있다. (후략)

       -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



매혹적인 감상적 분위기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지만, 정작 시상의 맥락이나 시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짚어 주는 해설은 거의 없는 작품입니다. 모든 해설이 한결같이

‘6·25 직후의 상실감(喪失感)과 허무주의를 짙게 띤 작품, 모든 것이 부서지고 퇴색하여 떠나가는 데 대한 절망감과 애상(哀傷)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김흥규)

는 정도의 막연한 감상에 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해석이 어려운 작품인가 봅니다.

필자가 아는 한, 이 작품의 전문을 해설하는 일은 아마 처음일 듯합니다.


해석의 핵심은, ‘목마’와 ‘숙녀’의 상징적 의미를 찾는 일입니다.

‘숙녀’는 ‘자라’면서 ’문학‘과 ’인생‘, ’사랑의 진리‘를 잃어 버린 ’내가 알던 소녀‘의 성장 후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장하면서 그녀와 분리되는 ’목마‘는, ’소녀‘가 가졌던 ’문학, 인생, 사랑‘에 대한 관심 곧, 꿈과 이상, 순수함의 상징입니다. ’목마‘의 이미지가 주는 동화적 순수성, 불변성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단서로 이 작품을 다시 읽어 보려 합니다.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화자는 인생을 생각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버지니아 울프의 인생, 그리고 꿈과 이상을 가졌던(목마를 타고 떠난) 한 숙녀의(떠날 때는 소녀였지만) 삶의 과정과 자취(옷자락)가 화두입니다.

‘주인’인 ‘숙녀’는 ‘내가 알던 소녀’의 성장 후 모습입니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라고 했지만, '목마'가 꿈과 이상, 순수함을 잃은 ‘숙녀’와 헤어진 것이니, 사실은 '소녀'가 ‘숙녀’가 되면서 ‘목마’를 떠난 것입니다. '목마'도 '주인'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추억으로만 남고(방울소리만 울리고),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가을 속으로 떠났다).

꿈은 상실되고(별이 떨어진다), 그런 인생의 과정을 생각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술잔) 화자의 가슴에 회의가 스며듭니다(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라는 시구가 이 작품의 해석을 어렵게 만듭니다. '목마를 타고 떠날' 때는 '소녀'였으니,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라고 했으면 이해가 더 쉬웠을 텐데, '숙녀'로 성장하면서 변해 가는 과정과 모습(숙녀의 옷자락)에 촛점을 두다 보니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으로 표현한 듯합니다.

# ‘숙녀’를 버지니아 울프나, 그의 작품 속 ‘올랜도’나 ‘댈러웨이 부인’ 또는 ‘등대로’의 ‘램지 부인’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완결체입니다. 작품 외적 정보를 가져와야만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면, 독립된 작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했다는 정도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아, 작품 외적 지식으로 보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앞부분의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곧, ‘숙녀’로 성장한 ‘소녀’가 변화해 간 모습이 구체화됩니다. ‘내가 알던 소녀’는 ‘문학’과 ‘인생’을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버렸고(죽고), ‘사랑’을 ‘진리’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 ‘애증의 그림자’가 불편하기만 합니다(그림자를 버릴 때). 인생의 꿈을 가졌던 순수한 소녀(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는 이제 사라져 버렸습니다(보이지 않는다).

‘소녀’가 ‘자란’ 곳은 ‘정원’입니다. ‘정원’은 관리되고 조절되는 곳입니다. 소녀'는 사회, 세속이라는 ‘정원’의 영향 안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변화는 소녀만의 일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학’을 버리고 ‘인생’을 고민하지 않고 ‘사랑’의 순수성을 떠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화자가 느끼는 이 삶의 회의적이고 절망적인 모습을, 사람들은 성장이고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화자는 이 우울한 삶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야 한다’로 종결되는 이 부분의 문장들은, 바로 이러한 심정의 표현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켜(세월은 가고 오는 것), 어느 때가 되면 세속과의 영합을 위해(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순수를 버려야 하고(시들어가고), 꿈과 이상을 접어야 합니다(작별하여야 한다).

화자는 절망감 속에서(바람에 쓰러지는 술병, 늙은 여류작가의 눈), 아무런 희망이 없는(불이 보이지 않는 등대) 미래의 회의적인 삶을 지켜보고(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꿈과 이상, 순수의 옛 모습(처량한 목마 소리)은 기억 속에 묻어 둘 수밖에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들을 떠나 보내는 사람들(모든 것이 떠나든), 그런 모습이 싫어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죽든)을 그대로 보면서, 아직은 남아 있는(희미한 의식) 미련을 간직한 채,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한 인생(버지나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화자는 이 허무하고 절망적인 삶을 견뎌내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는 일은, 뱀이 새로운 피부를 얻기 위해(청춘을 찾은) 일부러 좁은 바위틈을 지나면서 허물을 벗겨내는 일처럼 괴롭지만, 화자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할 수밖에(눈을 뜨고) 없습니다.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화자가 인생이 외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인생이 실제로 그래서가 아니라, 본래 그런 것이니 외로워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인생은 대중 잡지의 표지 그림이나 사진처럼 본래 저속한 것이랍니다. 욕하고 두려워하면서(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상과 순수는 기억과 상상 속에서만 있을 뿐(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실제로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목마는 하늘에 있고).

사라져 가는 화자의 모든 가치들을 생각하며(가을 바람소리는), 질식할 듯한 인생의 절망감 속(쓰러진 술병 속)에서 술에 취한 화자의 목메인 울음소리가 퍼져 갑니다.


시상의 전개 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상과 순수, 사랑의 진실을 상실해 가는 인생의 모습 인생에 대한 회의와 절망 통속적인 삶에 대한 체념 

작가의 이전글 <우리 시 다시 읽기> 정현종, '방문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