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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Jun 13. 2024

<우리 시 다시 읽기> 백석, ‘팔원(八院)'

문해(文解)가 안 된 시 해설

차디찬 아침인데

妙香山行(묘향산행) 乘合自動車(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慈城(자성)은 예서 三百五十里(삼백오십리) 妙香山(묘향산) 百五十里(백오십리)

妙香山(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自動車(자동차) 유리창 밖에 

內地人(내지인) 駐在所長(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車(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內地人(내지인) 駐在所長(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계집아이는 묘향산 근방에서 살고 있는 삼촌을 만나러 간다고 말한다. 창문 밖으로 일본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아이를 배웅한다. 그것을 본 어린 여자아이가 울고 그것을 보며 차 한 구석에 있는 사람도 눈물을 흘린다. 화자는 아마도 여자아이가 몇 해 동안 그 일본인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질을 하고 아이를 보는 일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어린 여자아이가 떠나는 날처럼 추운 날에도 찬물에 걸레질을 하느라 손이 얼었을 것이라는 화자의 추측으로 시는 마무리된다.

이 작품은 일본인(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하러 떠나는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니, 위에 소개한 글이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해설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 해설은,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과는 사뭇 다릅니다. 짚어 보겠습니다.


1. 차에 탄 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묘향산 근처에 삼촌이 산다고 합니다. 고향일 듯한 자성으로 돌아가는데, 가는 길에 삼촌 집에 들러서 가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계집아이가 자성이 목적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위 해설은 계집아이가 묘향산 근처의 삼촌집에 더부살이를 하러 간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2. 계집아이의 여정과 관련된 대화는, 차에 탄 뒤 차 밖에서 배웅하고 있는 사람들과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는 도중에 다른 승객과 나눌 내용이 아닙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승객 간에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차에 오른 계집아이는 화자와 자기 여정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주재소장(파출소장)이 그의 딸과 자기 내임(차비)을 내 주는 장면을 보면서 흐느껴 웁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3. 이 시는 일본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 어린 한국인 계집아이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를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 계집아이와 그가 돌봤던 일본인 자식과의 눈물 어린 이별, 그리고 그 가슴 아픈 이별에 한쪽 구석에서 같이 눈물 짓는 사람(대부분의 해설들이 이 사람을 화자라고 합니다.)의 모습이라니요. 주제와는 한참 거리가 먼 모티프입니다.



나는 이 시가 현재와 과거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1-8행은 현재 화자가 보고 있는 정경, 9-16행은 계집아이의 말을 토대로 계집아이가 처음 이 곳에 올 때의 정경을 상상해 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전반부에서 식모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계집아이의 갈라진 손등만으로도 그 고생스럽고 한스러운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집을 떠나와 멀고 먼 타향에서 낯선 일본인 집에 식모로 넘겨지는 어리디 어린 계집아이의 막막하고 서러운 모습이 들어감으로써, 이 작품의 비극성은 한층 더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백석 시인의 능력일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 1-8행

추운 아침 팔원 터미널인 듯한 곳에서 화자는 묘향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텅 빈 버스로 한 계집아이가 오릅니다. 옛날이야기에 나올 법한 짙은 초록색 저고리가 새것이라 먼 길을 가려고 애써 차려 입은 듯한데, 그의 손잔등은 험한 일 때문에 갈라져서 피가 나올 듯합니다. 얘기를 나눠 보니 계집아이는 여기서 삼백오십리 떨어진 자성(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중강진 근처. 계집아이의 고향인 듯)으로 간다고 하는데, 가는 도중 여기서 백오십리 거리에 있는 묘향산 근처에 삼촌이 살고 있어 거기에 들러가려고 한답니다.


* 9-16행

이 부분은 차안에서 계집아이에게서 들은 말을 토대로, 계집아이가 처음 주재소장 집에 식모살이를 오던 날의 정경을 화자가 상상한 내용입니다. 

몹시 추운 아침 일본인 주재소장(파출소장)같은 어른과 어린 계집아이가 차비(내임)를 내고 있습니다. 주재소장이 자기 집에 일하러 오는 계집아이를 기다렸다가 차비를 내 줄 수도 있고, 혹은 주재소장이 직접 계집아이를 데리고 와서 차비를 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아무튼 이 장면은 1-8행과 같은 현재의 일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1-8행에서 계집아이는 이미 버스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나 낯선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게 된 계집아이는 막막한 두려움과 서러움에 그저 흐느껴 울고 있습니다. 차안 한 구석에는 한 사람이 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과거의 상상이라면, 이 사람은 화자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계집아이를 주재소장에게 데려다 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비교적 여기서 가까운 곳에 살아 조카를 주재소장 집에 소개한 삼촌이 아닐까 합니다. 삼촌 집에 들른다는 말도 이런 추정의 한 단서입니다. (이 사람을 버스의 운전기사라고 하는 해설도 있긴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 어린 계집아이의 일본인 주재소장집 식모살이는, 밥을 짓고 아이를 돌보고 추운 겨울 아침에도 찬물 걸레질을 하느라 피가 나도록 손잔등이 쩍쩍 갈라져 가면서 몇 해가 되었을 거라고 화자는 짐작합니다. 



화자는 추운 겨울 손등이 터진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얘기를 바탕으로 그가 먼 고향을 떠나 낯설고 두려운 일본인 파출소장 집에 넘겨져서 모진 식모살이를 시작했던 때를 상상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담담한 서술이 오히려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작품입니다.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있거나 작품성이 뛰어난 시를 잘 해설해 주는 일은, 문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려면 문학교수나 비평가, 문학교사, 강사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해설하면서 일반인의 감상 능력 향상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저명한 교수나 비평가의 연구서나 해설서,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만든 교사용 지도서, 그리고 그 지도서를 베끼는 참고서나 인터넷사이트를 보면 참 의아한 때가 많습니다. 감상안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야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적어도 문장 자체의 의미나 그 행간의 기본적인 뜻만큼은 잘 짚어 주었으면 합니다. 

예컨대, 지도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문맥으로 보면 자성으로 가는 길에 묘향산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건만, 계집아이가 가야할 길이 오백 리라고 하는 해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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