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백 - 생각 내리기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던 어느 밤이었다.
정신없는 소음이 가득하던 사무실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각자 할 일을 정리 중이었다.
바쁜 낮이면 빠른 캡슐 커피를 마셨겠지만,
조용하고 천천히 내릴 수 있는 드립백을 하나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물을 받고, 전원을 올린다.
전기포트의 물소리가 점점 요란해졌다.
자주 쓸 일은 없어서 어색하게 뜯은 드립백을 얼음 넣은 컵에 올려놓고,
물을 한 번 내렸다.
물은 천천히 드립백을 채우고, 금방 내려앉았다.
뜨거운 증기를 타고 커피 향이 퍼져나갔다.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두 번 내렸다.
물은 천천히 드립백을 채우고, 내려앉았다.
커피 향을 맡다 보니 "내가 커피를 좋아했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려고 급하게 캡슐커피를 들이켜거나,
점심 먹고 입이 느끼해서 아메리카노를 삼킬 때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나도 나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물을 세 번 내렸다.
물은 천천히 드립백을 채우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어쩌면 나도 나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잘 모른다.
주변 사람의 평가로 그려지는 겉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나보다는 주위를 둘러봐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은 점점 바쁘고, 책임은 늘어갔다.
부모의 소중한 자녀였던 나는 어느새 그들의 보호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뭉치면 두려울 게 없던 친구들은 간간이 안부를 전하며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떠들썩한 모임을 피해 나만의 시간 속에서 그간 받은 상처를 회복하기 바빠졌다.
눈치챌 겨를이 없이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더 내려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컵에 얼음을 많이 채워 넣었으니 한번 더 내리기로 했다.
눈치챌 겨를조차 없이, 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어른의 삶은 조금 더 멋진 모습이었다.
멋진 성과를 함께 나누는 동료들과 퇴근하고 즐기는 취미.
나만의 공간에서 자기개발도 해보고,
가끔은 늦은 저녁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있는 삶.
과도한 업무는 내 생명을 빚져서 수행되고,
피로는 의욕을 앗아간다.
삶을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일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지금은
어느 것이 우선인지조차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내 이상에 비해 나의 삶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각이 끝나지 않아서 한번 더 내렸다.
내 이상에 비해 나의 삶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각이 잠시 멈추고, 우선순위를 생각해 본다.
삶이다. 생명이 우선이다.
삶의 활력을 만드는 것은 멋진 취미와 번듯한 물질이 아닌, 나의 정신이다.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니 그제야 고소한 커피 향이 코를 찌른다.
창밖을 보니 이미 세상은 잠들고 달이 밝았다.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얼른 퇴근하기로 결심했다.
오늘은 집에 가서 내 삶을 살기 위해 조금 늦게 자야겠다.
나는 드립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