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재일교포 3세로서 자란 제가, 한국어 공부 겸 "대한민국"을 알기 위해, 배운 것들을 브런치에 남긴다.
오타, 비문, 양해 바란다.
생년월일: 1979년 3월 10일
국적: 조선→한국
주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출생지: 일본 치바현 마츠도시
직업: 말레이시아에서 법인 설립 중.
가족: 일본인 남편과 6세 아들, 총 3명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3세. 자영업을 하면서 북한에 상당한 충성심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일본의 사립대학에 외국인 용의 "추천"으로 운 좋게 합격해서 진학.
당연히 부모도 조선학교 출신. 아버지는 대학교까지 다니신 "빨갱이".
저의 취업 후 경력은 후지쯔에서 4년 반, 야후에서 5년, Tonchidot에서 2년 이상을 보낸 후 잠시 니트 생활을 거쳐, 필리핀의 KDDI에서 2년, YOYO Holding에서 10년째 근무하면서 말레이시아에 법인 설립 중.
인터넷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니트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IT/Web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해외 경력은 필리핀에서 4년간 근무하다가 남편의 직장 변경에 따라 말레이시아로 이주.
코로나 이전에는 업무상 마닐라와 자카르타를 자주 다녔음.
주변 친구들은 모두 '사쿠라이 유리코', '시무라 유이치'와 같이 이름이 6~7자인데, 나만 'カンスニ'라고 4자뿐이어서 콤플렉스를 느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방침에 따라 조선학교에 다녔다. 모두, 이름이 짧아서(한글로 2자 또는 3자) 이런 세상이 있구나, 고 놀랍게 느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믿는 타입이어서, '조선반도는 95년에 통일될 것이다', '『남조선』을 『한국』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을 바보처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지만, 당시에는 솔직히 믿었습니다!!)
매년 대보름날, 북한 평양에서 김일성이 주관하는 설맞이 공연이라는 '북한 각지에서 선발된 어떤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김일성과 조선로동당 간부들이 보는 잔치'가 있다. 1985년쯤부터 재일교포할당 같은 것이 생겨, 일본의 조선학교 학생들도 그곳에서 공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학교 선생님의 지명이 있어야 했다. '학업이 우수하고, 무언가 예술(무용이나 노래, 악기 등)에 뛰어나며, 부모가 총련계 일을 하는 사람'만 갈 수 있다는 통설이 있었다. 내 집안은 부모가 총련계 일을 하지 않는 그늘진 위치여서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서 오디션에 참가하라고 말씀하셨고 '부모가 총련계가 아니라서 안 될 것 같은데… 왜 내가?'라는 생각을 하며 오디션을 봤는데, 뜻밖에도 합격해 북한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추후 알게 되는 "김정은의 어머니가 저의 아버지 쪽의 먼 친척"이라는 핏줄이라는 게 이때는 전혀 몰랐다)
1993년 11월 하순, 유명한 만경봉 92호라는 배를 타고, 니가타(新潟)에서 북한의 '원산'이라는 항구로 출발했다. 처음으로 밞게 되는 우리나라.
그렇다. 저에게는 북한이 "우리나라"였다.
당시 14세 소녀였던 나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나라"라고 배운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원산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다, 조금 다른 것 같아"라는 느낌을 받았다.
원산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 날 평양으로 버스로 이동했는데, 원산의 호텔은 "전기가 어둡고 분위기가 결코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나라"답지 않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나라에서 2개월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니야, 평양은 다를 것이다.
평양에서 머물렀던 장소는 당시 국내 최고급 호텔의 하나인 창광산 호텔이었다.
(완전 탑 호텔은 당연히 고려호텔이다)
호텔에서는 연습에 매진하는 날들을 보냈는데, 학업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호텔에서 집에 전화를 해서 "엄마, 우리나라(북한)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데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무슨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설맞이 공연 성공을 위해 열심히 연습해"라고만 해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담당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나의 통화가 도청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사건과 "믿었던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그 이후로 믿었던 것들에 대한 불신감이 생겨났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어느 정도 힘든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화장실 물이 안 내려가거나, 한겨울에 샤워 물이 나오지 않는 등의 환경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동남아시아 신흥국으로 이사한 사람들이 인프라에 대해 불평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북한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한다.
북한에서의 경험은 언젠가 따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집에는 아마도 현지에서 쓴 일기도 아직 있을 것이다.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 "접견사진"이라고 불렀다.
문장이 길어졌으니 고등학교진학 후의 이야기는 Part2 에이 어집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