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1993
‘중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흘렀어도, 작품 속 아름다운 선율은 단언컨대 영세할 것이다.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청데이의 장국영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것처럼.
제목 그대로, 영화에서는 경극 ‘패왕별희’가 극중극 형식으로 여러 번 공연된다. 경극 ‘패왕별희’는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동시에 영화 속 주인공들의 운명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이 끝나는 장면뿐 아니라, 시끄러울 것 같기만 한 경극 장면들은 놀랍게도 우리의 편견을 가볍게 깨부쉈고, 이 모든 것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장면들은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영화 초반부 경극학교 아이들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상한 찝찝함마저 맴돌았다. 울부짖는 아이들의 서글픈 목소리와 선생들의 자비 없는 매질 소리가 쉴 새 없이 뒤섞이던, 불편하기 그지없는 그 장면은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경극학교의 학생은 최소 7~8년, 때로는 12년까지 수련을 받으며 기초훈련에 이어 노래, 영송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한다. 즉, 수련은 평생 계속된다는 말이다.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극, 화려한 분장과 함께 무조건 적인 ‘아름다움’을 필요로 하는 창극 예술. 나는 그 ‘아름다움’의 이면을, 아이러니하게도 경극학교 아이들의 울음소리에서 ‘보았다’.
처참했다. 그래서 아팠다. 아이들은 성 정체성을 강요받는 것은 물론, 고문 수준의 학대를 당하면서 예술의 도구 따위로 취급되고 있었다. 평생을 연기하는 인물로서, 무대에서 ‘나’를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가?
평생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결코 다르지 않다. 셀피를 찍지만 얼굴의 반을 가린다. 아름답기 위해 사진 속 ‘나’를 깎고, 늘리고, 지우고, 덧칠한다. 마치 조소하듯 결국 완성된 작품을 곳곳에 전시한다. 얼굴 모를 누군가의 ‘좋아요’에 희열을 느낀다. 그들의 가식적인 칭찬에 활력을 얻는다. 존재는 비어있고 영혼은 사라졌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나’를 잃은 수많은 청춘들이 부지런히 자리를 채워가는 요즘. 이제는 모두가 타인의 시선에서, 타인의 생각에서, 타인의 잣대에서, 타인의 입맛에서 벗어나기를. 인생이란 끝없는 무대에서 화려한 가면은 잠시 내려두고 솔직한 ‘나’를 마주하기를, 나는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맹목적으로 좇는 ‘아름다움’은 허무한 허영 따위에 불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