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작성됨.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영화란 대중의 호흡과 맞닿음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대중예술’이라 굳게 믿는 나에게 이 사람의 영화는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결코 영향받고 싶지 않은 예술인이니까.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우선순위 밖으로 밀어냈고, 굳이 찾아볼 생각이나 우연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제라는 명목하에 그의 시간을 한 시간 정도 훔쳐본 것은, 나도 적절한 명분 따위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신발 끈 풀린 남자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낯선 흑백 영화라는 이질감은, 후에 시간적 개념 파악이 조금 불편할 때 깨달았으니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남자는 인생을 통달한 교수 행세를 하는 이기적인 한 인간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내 섣부른 이 확신에 기어코 마침표를 찍었다. “네가 행복해야 돼”라며 자신의 행동들에 적절한 합리화나 해대는 이 남자는, 그럴듯한 문장들을 늘어놓으며 허울 꾸미기에 바쁘다.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그의 행위는 그의 말마따나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까?
우연은 신기하다. 하지만 신기하기에 우연인 것은 아니다. 작위적인 우연 따윈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우연이 가지는 신비로움을 남자는 적절하게, 본능과 섞어 기회를 만들어 이유를 감췄다. 술에 취해서일까. 삶에 치여서일까. 자신의 무의식이 잡아대던 그녀와 닮은 ‘소설’ 속 여인의 몇 년을 왜 휘젓고 도망친 것인가. 주제넘게 연민을 느낀다고 지껄인 이상형과 얼추 맞아서 일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가 자기 감정을 숨기느라 참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불쌍한가. 속은 비워놓은 채 겉만 채워나가는 것이.
술자리에선 저마다 철학가가 되어 맛없는 인생사나 늘어놓기 바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뚱이만큼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자기 인생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꼴깞이나 떠는 것이다. 서로의 극단에 공감하고, 끝끝내 위로하거나 위로받으며. 우리도 다를 바 없는 이러한 발버둥들을, 홍상수는 불편할 만큼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화면 안에 담아냈다.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그의 절정이라고, 침 튀기며 극찬하던 영화 학도들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냐면 나는 절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이 영화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으니까.
마지막까지 남자는 말한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뭘 아는 척, 자기 말을 들으라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취하지 말고, 일기를 쓰라는 남자의 말은 진정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에게 행복하라 내뱉은 그는, 과연 행복한가. 그의 공허함을 뒤덮은 것들은 담배 연기만큼이나 쉽사리 사라져간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터벅터벅 나아간다. 그가 뱉었던 말들의 방향으로. 그러고 보니 중반쯤 묶여있던 남자의 신발 끈은, 마지막이 되니 다시 풀려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