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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Feb 19. 2024

37. 부모의 진짜 걱정과 가짜 걱정

당신과 나의 고통



도움이 필요해보일 때는 <돕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준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다리를 다쳐 주저앉은 사람을 보았다. 명백히 도움이 필요해 보일 때 대부분의 사람은 돕는다. 상처를 지혈해 주거나, 119에 신고를 하는 등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하다못해, 상처 주변을 닦을 휴지라도 건네게 된다.

정말 걱정이 되면 행동을 한다. 눈앞에 도와야 할 사람이 있는데 걱정된다는 말만을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녀에 대한 걱정이라면 어떤 부모든 당장에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약을 먹인다. 아이가 어떤 과목을 어려워하면 그 과목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거나 함께 공부하려고 한다. 자녀가 걱정이 되면 <행동>을 한다.







나는 내가 걱정돼


나를 위한 것처럼 보이는 가짜 걱정들


친정엄마가 자주 하던 걱정이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동복형제를 가리켜 "그 아이는 직업도 좋고 걱정할 게 없는데, 너는 대학도 안 나오고 직업도 없어 걱정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진짜 걱정이었을까 가짜 걱정이었을까? 그녀가 내가 진짜 걱정이 되었다면 나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말과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걱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걱정은 < 나는 내가 걱정된다. 이제 늙어서 먹고 살길도 막막해서 걱정이 된다.> 라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에 시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빨리 서울로 올라와야지.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니. "  부모님이 걱정을 하신다고 부채의 규모를 더 늘리고 이사를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생각해 보았고 이내 알게 되었다. 시아버님이 우리가 정말 걱정이 되셨다면 금전적 도움이나 혹은 응원과 격려를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의 걱정도 우리에 대한 진짜 걱정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너희가 걱정돼. 가 아니라, <나는 늙었고 너희의 보살핌이 필요해. 나는 나 자신이 걱정돼>인 것이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을 나를 위한 것이라고 강요받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걸 원하는 것은 본인이시지 나는 아니다. 가고 말고의 선택은  우리 가족의 선택이며 영역이 아닌가.







너희가 부모의 사랑을 알겠느냐.


너희가 부모의 사랑을 알겠느냐?


걱정을 하며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 진짜 걱정이 아니다. 그것은 걱정이라는 옷을 걸친  불안, 우울, 죄책감, 수치심, 열등감 같은 자기감정이다. 그런 자기 들을 많이 본다. 그것이 자기 것인지도 모르고 하는 걱정들을 본다. 그리고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이 자녀에게 있다며 그 걱정을 자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모님을 본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너희가 부모의 사랑을 알겠느냐고 말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본다.


그런 사랑 앞에서 때로는 말문이 막힌다. 어떤 말을 한대도 그들은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그것이 위선적인 인간성인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성인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그들의 걱정이 자녀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이기를 거부하려는 나의 발버둥 앞에 펼쳐지는, 인간이므로 너무나 인간이고자 하는 모습들 앞에서 이내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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