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이모티콘을 그리고 왔다
나는 비전공자 회사원으로 주로 주말에 이모티콘을 그린다. 때로 삶이 바빠지면, 주말도 여의치가 않다. 그래도 꾸준히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모티콘을 꾸준히 그리는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온전히 몰입하게 된다.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풍선을 매고 밤하늘을 부유하는 비현실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마음껏 그리고 색칠하면서, 담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하면서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나는 그림을 대단히 잘 그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모티콘 창작을 통해 내 마음을 표현하고, 내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세상과 연결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에서 내가 올렸던 글과 이모티콘, 그림을 본 대학교 학생사회공헌단 다온길팀 친구의 메일을 받았다. 학생들은 아이들이 직접 이모티콘을 창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만들어진 이모티콘을 통해 판매 수익을 창출하여 기부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카카오 이모티콘 작가인 내가 아이들에게 이모티콘 그리기를 알려 주는 역할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추운 겨울, 말갛고 앳된 얼굴의 대학생 친구들과 사전 미팅을 진행했다. 요즘 같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이런 친구들을 만나니,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만나게 될 아이들을 "Young Artist"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창작을 통해 느꼈던 몰입과 즐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었다. 고민 끝에 이모티콘 그리기 수업 강의 자료들을 만들었다. 따뜻한 봄날, 마침내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는 다 같이 팀이 돼서 이모티콘을 만들 거예요." 내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비장함으로 반짝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고, 대학생들이 일대일로 아이들과 함께 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아이들과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6세에서 12세 사이의 아이들의 집중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각자의 개성이 담긴 캐릭터를 만들고, 하고 싶거나 듣고 싶은 말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했다. 어린아이도 있어서, 이모티콘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고양이 귀" , "토끼 귀" 같은 캐릭터 구성요소를 스케치로 그려갔다. 아이들이 블록처럼 캐릭터를 조립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토끼도 고양이도 아닌, "토끼 귀와 고양이 귀"를 모두 가진 캐릭터를 만들었다. 아이는 토끼도 좋고 고양이도 좋아서라고 수줍게 말했다. 어떤 아이는 노란 고양이를 그리고 "노른자"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붙였고, 귀여운 별무늬 옷을 그렸다. 숙제에 질려버린 판다를 그린 아이도 있었다. 펭귄과 물고기 친구를 함께 그려서, 펭귄이 웃을 때 물고기가 무지개색으로 변하고, 펭귄이 놀라면 물고기가 빨간색으로 변하도록 그린 친구도 있었다. 아이들의 개성이 물씬 담겨있는 그림을 보며 놀랍고 보람을 느꼈다.
수업 마지막 날, 나는 아이들이 만든 이모티콘으로 열쇠고리를 만들어서 선물했다. 수업 초반에, 티니핑 등 유명 캐릭터를 보고 환호하던 아이들이었다. 수업 말미에는, 직접 만든 이모티콘이 그려진 열쇠고리를 쥔 아이들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감사하게도, 수업을 참관한 어머님들이 "아이가 이 시간을 일주일 동안 기다렸다. 재미있는 미술수업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씀해주셔서 뭉클함을 느꼈다. 아이들의 마음도 궁금해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아이들은 나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시간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래, 창작은 나만의 고유한 것을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창작의 시간을 보내고, 이모티콘 작가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보니, 문득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의 창작이 위협받는 요즘이 떠올랐다. 인공지능을 통해 만든 작품이 문학상도 수상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인공지능이 마치 인간의 창작처럼 아주 참신한 무엇인가를 생성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수많은 인간의 창작물을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조합해내는 것이다. 현대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신경망을 모사하여 학습이란 이름의 복잡한 연산으로 구성된 딥러닝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인공지능의 창작물은 연산 결과이다. 드물게는, 학습 데이터가 거의 변화되지 않고 출력물로 나오기도 하는 문제점도 있다. 인간의 머릿속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공지능의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 같아서, 해당 문제들을 완벽히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인공지능의 생성에는 인간의 프롬프트 외에 인공지능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다. 사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챗지피티 같은 서비스는 뇌 역할을 하는 인공모델을 인간의 지시를 잘 따르는 에이전트로 학습한 형태이다. 우리가 많이 쓰는 인공지능들은 지시에 따라서 생성할 뿐, 자기 주도성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도 없다. 어린아이는 고양이 귀와 토끼 귀를 함께 그려 나만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인공지능은 아이가 그린 캐릭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고, 프롬프트 없이 스스로 창작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아마 아이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학습했을 텐데, 그 학습 데이터에 갇혀있다. 인공지능은 생장하는 삶의 세계에 침범할 수 없다.
그렇기에, 현재 저작권법에 따라, 인간의 창작물과 인공지능의 창작물은 명확히 구분된다. 저작권법상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저작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 수준 이상의 작품이라는 제한이 없고,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인간의 사상과 마음은 창작자의 고유의 삶에서 비롯된다. 인공지능을 통해 아무리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도 그 안에는 삶이 존재 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 창작의 시간 동안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한다. 그 집중 속에서 내 삶의 기억들과 마음들이 반영된다. 아이들도 입술을 앙 다물고 집중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모티콘 그리기 수업에서는, 나는 창작자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몰입한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무척 행복했다. 30대 회사원으로써 내 삶은 경제적 안정, 재테크, 회사 내에서 성과 같은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개나리 꽃처럼 피어나는 여리고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이, 푸르른 청록 같은 싱그러운 대학생들의 마음이 내게 전해졌다. 아이들이 표현하는 이모티콘들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 마음도 떠올랐다. 대학생들의 타인을 돕는 마음은 내가 잊고 있던 마음을 상기시켜 줬다. 마치, 누군가 만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볼 때 내 삶을 떠올리고 공감받고 위로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계절을 보내고 있지만, 창작의 시간 동안 함께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인간에게 창작은 삶에서 피어난 마음을 표현하는 것, 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의 연산 처리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내 삶과 다른 이의 삶 속에 퍼져나가는 것. 아이들과 학생들과 함께 했던 지난 봄은 인공지능은 모르는 삶의 계절에 푹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