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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또 다른 이별

-엄마가 떠난 후 센터에서 만난 여사님은...

by 홍제남

얼마 전 아버지는 엄마에 이어 또 다른 애달픈 이별을 하셨다.

아버지는 1937년생이시다.

1년 가까이 주간보호센터에서 가까이 지내셨던 동갑내기 여자친구인 0 여사님이 세상을 뜨셨다.

돌아가시기 5일 전에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 하셔서 아버지는 병원에 가셨다.

0 여사님은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아버지도 같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다 돌아오셨다 한다.

아버지와 여사님은 정말 아름답게 깊은 우정을 나누셨다.

올 초 아버지 생신에 여사님은 생일축하 편지와 10만 원 봉투를 선물로 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같이 살자고 할 텐데 말이요"라고 하셨고,

여사님은 "나는 5년만 젊었어도 그랬을 걸요"라고 화답하셨다 한다.

이 말을 전하시는 아버지는 함박웃음으로 빛이 났었다.

두 분의 깊은 우정은 정말 따스하게 느껴졌고 자식들도 열심히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랬던 분이 여름경에 예전에 앓으셨던 병이 다시 재발해서 병원에 입원하셨고 이어 요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마지막 이별을 하셨으니 지켜보니 자식들의 마음도 너무나 안타깝고 애달프다.


4년 전 가을에 엄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셨다.

66년간 말 그대로 '한 이불'을 덮고 사셨던 사이라 아버지의 상실감은 너무나 컸었다.

1년 넘게 마치 이어 세상을 뜨실 정도로 쇠약해지시고 힘들어하시던 아버지는 겨우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리고 가기 싫다는 아버지를 겨우 설득해서 놀이 삼아 친구도 사귀시라고 주간보호센터를 권하여 다니기 시작하셨고 다행히 재밌어하셨다.

아버지는 평생을 너무나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오셨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19살에 17살 엄마를 만나 결혼했고 7녀 1남의 자식을 두셨다.

엄마의 고집으로 기어코 아들을 낳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결과로 8번째에 아들을 보았다.

8남매를 기르시느라 아버지는 무진 애를 쓰셨고 원하는 자식들은 모두 번듯하게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셨다.

평생 고생하시면서도 아버지는 엄마를 엄청 위하고 아끼시고 미안해하셨다.

비록 성격이 급해서 가끔 버럭 소리를 지르긴 하셨지만 그 시대 남자들 같지 않게 다정하시고 음식도 잘하시고 집안일도 잘하셔서 마을에서도 소문이 난 애처가셨다.

엄마가 갑자기 가신 후 아버지는 농촌에서 시내로 나오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니시게 된 센터에서 좋은 분과 만나서 사이좋게 우정을 나누시며 주말에는 식사도 같이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가 좋았었다.

여사님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좋은 영감님을 두고 아주머님은 어찌 먼저 가셨을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한다.

여사님은 물방한울 안 묻히고 자란 고명집 딸이었고 그 당시에 명문대학까지 졸업하신 분이었다 한다.

그런데 작년에 아버지가 펴낸 일생을 적은 자서전을 보신 후 진심으로 존경한다며 너무나 훌륭하신 분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다.


이렇게 마음을 나누며 지내시던 여사님이 병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한 후 아버지는 전화를 걸으셨단다.

여사님은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서 아주머님이랑 같이 재미나게 지내요. 더 이상 이제 전화도 걸지 마세요"라고 하셨단다.

그런지 겨우 두달여 지났을 시점인데 이렇게 아버지는 또다시 슬픈 이별을 하셔야 했다.

아버지는 장례식장에 가지 않으셨다.

그렇게 잘 갔으면 되었다 하시는데 눈에 눈물기가 맺히신다.

마음이 저려온다.

엄마 가신 후 외롭지 않게 지내실 수 있는 마음 가는 친구가 있어서 자식들 마음도 같이 녹았었는데..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다.

아버지에게 여사님의 죽음이 어찌 다가올지 걱정이고 아리다.

그저 겉으로는 수많은 가까운 이들을 먼저 보내시며 '또 갔네' 라며 넘기시는데 그 깊은 속내까지야 어찌 알 수 있을까?

아버지와 여사님의 영원한 헤어짐이 나의 가슴에도 왜 이리 깊이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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