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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이 Jan 25. 2024

내 남자친구는 카푸어다.

2024년 스물여섯 살이 된 졸업예정자 미대생, 남자친구는 카푸어였다

TV 화면에서 푸른 용의 해를 알리는 오색 빛이 반짝이고, DDP 앞에서 갑자기 취소된 새해 행사에 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인터뷰를 하는 신년 방송을.
강원도의 한 리조트 방 안에 앉아 벽걸이 tv를 통해 보고 있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이제 스물여섯이구나.


태어난 지 26년.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24년 11개월 11일 자정이 지난 그때, 유치하지만 주마등처럼 지나온 삶이 필름을 잇듯 죽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음. 상당히 쪼들리게 악바리로 살아온 기구한 청년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필 태어나기를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어릴 때 화가가 되겠다고 굴었고, 머리가 굵어지고 보니 예체능이랄 게 만만한 게 아니어서 미술 입시도 어영부영 부모님 눈치를 보다가 고2 막바지에 시작을 했다. 

스무 살 때 돈 없다는 부모님 바짓가랑이를 잡고, 내가 학원비를 낼 테니 재수 허락만 해 달라고 빌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꽤 컸었던 집 뒤편 월성동의 카페 뚜레쥬르에서 2시부터 5시까지 파트타임. 사장님이 정말 괴팍하리만치 불친절했으니 없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지만 또 내가 살던 대구의 작은 동네는 그런 큰 카페형 베이커리가 얼마 없어서, 당시 아이를 대동한 가족 손님들이 꽤 오시는 기묘한 가게였다. 주휴 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하루에 3시간만 근무하게끔 한 사장의 의도를 지금은 훤히 꿰고 있지만 당시 재수 공부를 하면서 학원비까지 벌어야 했던 나에게 3시간 파트타임은 한 줄기 희망의 빛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재수 학원은 너무 비싸서 말도 못 꺼내고 집 근처에 있는 LH 공립 도서관에 새벽부터 찾아가서 수능완성을 풀다가 출근을 했다. 그리고 알바가 끝나면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수성구 만촌역에 있는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얼레벌레 구색만 맞게 기운 삶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은 코빼기도 못 보고 대구에서만 이십 년을 살아온 날 것의 토박이였는데, 하나도 모르지만 수성구 애들은 서울 애들이랑 크게 차이가 없겠거니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수성구에 있는 학원에 도착하면 부모님이 주시는 물적 지원을 여한 없이 소비하는 아이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독재(독학 재수학원)가 끝나고 근처에서 밥을 사 먹은 뒤 학원에 왔다고 하는 친구들이 그땐 참 부러웠다.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시간이 없어서, 온전히 재수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재수생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지지를 받아 당당한 모습들이 빛나보였다.

 공부를 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미술에 재능은 있지만 전국구에 들 만큼 특출 난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화여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붙을 확률은 소수점대로 희박했다. 새 모의고사 문제집 하나를 못 사서 번개장터 중고란을 뒤지는 내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공부만 집중해 온 다른 아이들을 제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재수까지 하며 버린 1년이 아까워 눈을 낮출 수도 없었다. 까딱하면 정말 삼수가 어른거리는 시점이었다. 지금에서야 회상에 잠기며 이때의 모습을 적어 내려가는 게 가능하지만. 이때 서울에 오는 걸 실패했더라면 아마 스무 살의 썰은 평생 글로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운이었는지,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건지 그 해 재수로 이화여대와 고려대를 모두 합격했다. 땅거지의 출세였다.


서울 대학생이 되면 인생이 뭔가 확 바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건 없었다. 휴학 1년을 포함해 지난 내 5년은 돈벌이와 한국장학재단의 연속이었다. 6개월에 30만 원인 초저렴 교회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으면서,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서울 집값 체험판까지 확장팩으로 갖게 되었다. 안암은 또 상상 이상으로 퀄리티 대비 가격이 비싼 동네여서 5평에 45만 원이라는 돈을 내고 허름한 원룸에 2년을 살았다. 팀플로 중무장한 미대 수업을 들으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지만, 뭐 어떡해. 안 하면 쫓겨나니까 외주든 알바든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다. 기껏 서울에 올라가서 과외를 할 생각은 왜 안 했냐고 묻는다면, 이 당시의 나는 내가 서울에 올 자질이 없는 순도 120% 운빨 입시생이었다고 생각해서 감히 누구를 가르칠 자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날고 길 것 같기만 한 서울 학생들은 더더욱, 


중간에 유튜버의 노선을 타기도 하고, 약간의 방황을 겪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우선은 차치한다. 결국 어영부영 얼레벌레 메타로 무사히 졸업전시(미대생들이 졸업을 위해 꼭 해야 하는 졸업작품전시, 무지막지하게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 체력적으로 힘들다)도 마치고 초과학기 하나만을 남겨 둔 졸업예정자가 되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질이 좋지 않은 남자들의 플러팅을 많이 받아 왔는데, 이것도 지금에서야 질 나쁜 부류였다고 느끼지 당시 내 눈에는 그냥 사근사근 친절한 서울 남정네들이었다. 대구 사투리만 평생 듣고 살던 내 귀에 처음 들렸던 서울말은 정말 슈가코트 그 자체더라. 아직도 기억나는 서울 말 쇼크는 스무 살 재수 막바지에 실기 시험을 치러 서울에 올라갔을 때,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지하철 옆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던 커플의 대화다. 정말 뾰족하고 날 선 워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투가 다정하니 그냥 하나의 연극을 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실례였지만 지하철을 탄 내내 그 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완전 서울 초짜였던 당시의 나는 좋은 사람과 슈가 재킷을 입은 사람을 겉으로 구별할 수 없었고 아무나 덥석덥석 잘 믿었다. 많이 데고 이용당하면서 '미친, 이게 서울 연애?'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약간의 얼빠 기질이 있어서 일단 외모가 합격이면 무슨 말을 하든 일단 한 풀 유하게 마음을 열고 듣는데, 그 정도가 어릴 때 많이 심했던 건지 그간 서울에서 나를 스쳐 지나간 남자들을 돌아보면 허우대 반반한 양아치들이 정말 많았다. 제일 오래 간 연애가 100일이 한계였다.


그 난리통에 지금 남자친구를 만났다. 학교도, 직업도, 취미생활도 전혀 나와의 접점이 없는 별나라인 같은 이 휴먼을 학교 축제에서 만났다. 축제가 끝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고 있는 내게 다가와 번호를 받아갔는데, 웃긴 건 그때 친구랑 같이 띵띵 땅땅 릴스를 따라 추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뒤에서 다 봤을 텐데도 헌팅을 했다는 거다. 그리고 나는 어두워서 제대로 얼굴도 안 보이는 와중에 그냥 번호를 줘 버렸다. 일주일쯤 연락을 하다가 만났을 때는 이렇게 사람의 반경이 달라도 되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먹었다. 휴학하고 주식 관련 영업일을 하다가 적성에 잘 맞아서 자퇴하고 계속 근무하고 있다고 하는데, 자퇴? 고졸? 내가 생각해 왔던 가치관과는 너무 달랐기에 이 남자는 탈락이구나 싶었다. 내가 아등바등 서울에 온 이유가 명문대 입학이라는 가치였기 때문에, 학벌이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만 만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낮에 보니 멀끔한 외관과 성격, 자가로 태우러 온 외제차. sns 안 하는 너드 집돌이, 번 돈으로 부모님 챙겨드리고 술 담배 안 한다는 엄청난 메리트에 그만 혹해버렸다. 얼빠에 금사빠까지 한 스푼 얹은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학벌 하나 빼고 너무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잠깐만 만나다가 헤어져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 휴먼을 남자친구로 맞았다.


만나다 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식 영업이란 일이 하는 만큼 인센티브를 가져가는 구조인데, 남자친구는 이 분야에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한 달에 버는 금액이 일반인의 월급 수준을 훨씬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운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취미랄 게 없는데, 딱 하나 정말 진심을 다해 좋아하는 분야가 자동차라는 것. 여기서 이 글의 제목인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카푸어로 살아남기. 어떤 스포츠카 브랜드 중 가장 비싼 모델을 타 보는 게 인생의 꿈이라며, 굳이 잘 타고 있던 자가 외제차를 팔고 본인의 드림카를 리스로 빌렸다(리스라는 개념도 이때 처음 알았다). 이 놈을 빌리는 데 한 달에 300만 원이 나간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내가 얘랑 어떻게 물리적으로 만나게 된 걸까? 삶의 종족값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차를 몰기 위해 지불하는 금액이란 것이 나에게는 한 달의 생활비 플러스알파가 될 만큼 너무 큰 값이어서. 그런데 카푸어 남자친구라는 거, 내가 처음 겪어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미디어에 흔히 나오는 흡사 초롱이 여자친구처럼 되는 아닐까 걱정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그냥 조용히, 자기만족으로 차를 다루면서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반팔문신을 하거나 형광색 반바지를 입지도 않았다. 사람만 보면 오히려 너무 수수하게 다니며 가끔 골라주는 보세 티셔츠나 후드를 닳도록 돌려 입었다. 그런데 데이트할 때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취업계를 내고 200 남짓 주는 인턴 일을 하며 몰래 외주를 겸직해 달에 260 가까이 되는 돈을 벌고, 그중에 반은 월세와 보험비, 그리고 생활비 대출 상환으로 빠져나가 데이트비용을 많이 내기가 매우 부담스러운데, 물질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다는 척척 돈을 내고 여기저기를 데려가주었다. 분명히 사회적인 잣대에서는 좋지 않은 사람인데, 주변 사람 그 누구에게 남자친구 말을 꺼내봐도 모두 헤어지라거나 짧은 경험으로만 남길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런 파렴치한 생각을 감히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나는 좋았다.


다른 말이지만 나는 2023년 스물다섯 살 때 스키를 살면서 처음 타 봤다. 남자친구와 함께 처음 가 본 스키장에서 처음으로 내가 스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루 만에 상급자 코스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서울 근교 스키장을 다녀온 그다음 주에는 강원도에 있는 더 큰 스키장으로 나를 데려갔고, 2024년 새해가 밝기 하루 전 남자친구의 다른 커플 친구들과 함께 곤지암 리조트에서 호캉스를 보냈다. 전부 남자친구의 힘이었다. 내 삶에서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취미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는데 그는 모든 걸 당연하다는 듯이 척척 다니며 해냈다. 이 글을 집필하면서도, 내가 남자친구의 물질적인 부분에 빠져 좋은 면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인품이 어떻든 간에 벌이가 많다고 해서 저금하지 않고 모두 써 버리는 건 분명히 좋은 면이 아니니까, 미래를 함께 생각했을 때 조금 많이, 망설이게 되는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이런 생각들도 답을 잘 모르겠다. 2024년 내 나이 스물여섯 살, 거지처럼 너무 팍팍한 삶에 몸을 기워 맞추고 있던 내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삶이 처음으로 다가왔는데, 이 삶의 기회를 놓치기가 싫은 건 나쁜 것일까? 신년 데이트라 해 봤자 와인바에서의 저녁식사, 그리고 자취방에서 아이패드 7 화면 너머로 보는 제야의 타종 장면이었던 내게는 곤지암 호캉스가 너무 큰 행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지, 그의 재력을 사랑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금 더 이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다. 

잘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계실지, 사실은 내가 너무 가난하게 커 와서 생각보다 평범한 일상조차 대단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읽게 될, 어떤 공주님에게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과분한 삶도 별 것 없는 시시한 일상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한평생 쇤네로 살아와서 그 기분은 잘 모르겠지만, 카푸어의 여자친구가 된 삶이라고 해서 엄청난 걸 기대하고 읽어 주셨다면 죄송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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