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뻥쟁이글쟁이 Apr 07. 2024

#4  안성댁의 죽음과 주정뱅이 아버지의 인생마침표,

대환장 가족입니까..;#  4

동대문 시장의 지게꾼인 지 씨 아저씨는 그 날 벌어 그 날  모두 술로 탕진하는 슬픈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통금이 가까울 무렵이 되어서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외치며  술냄새와 딸꾹질 소리가 온 집안에 퍼지도록 요란한 귀가를 했다.

그때마다 안성댁의 시들지 않은 욕설이 한바탕 보태졌지만 주정이 극을 달릴 만큼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육시랄 눔, 다 늙어빠진 게 뭐 더 놀겠다고 허구한 날 육갑을 떠는지 원...작작 퍼 마시고 여편네나 을 일 이지 날마다 술에  쩔어사네 그려.

이사오기가 무섭게 살랑거리고 다니며 온 집안의 속 사정을 파악했던 안성댁은 누구네 숟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  다 알고 있는 판국이었던 터라 마누라가 주정에

못 이겨 집 나갔다는 사실을 혼잣말처럼 되내었다.

우물가의 맨 마지막 손님은 항상 지 씨 아저씨였다.

딸꾹, 한 번에 두레박 퍼 올리며 반 쯤 쏟아진 그것을 텀벙 내 팽개치는 소리...그리고는 씻는지 어쩌는지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틈틈이 들려오는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그런 노랫가락이 결코 흥겨운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 다음단계는 꺼이꺼이 신세타령으로 이어지는 두어 시간가량의 쌩쑈가 남아 있었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던지며 문풍지를 뚫어버리는 것은 다반사였고, 에잇 퉤퉤...쉴새없이 뱉어대던 가래침은 멀리까지 튀어나갔다.

심난하리 만큼 정확한 순서대로 이어지는 주정이 명숙아비보다 훨씬 한 수 위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집 나간 마누라를 향해 온갖 욕설을

억세게 퍼붓다가도 임자, 보구싶어 돌아 와..

나 혼자 어떻게 살라구...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희미해질 무럽 크어억 하는 괴이한 코울음으로

 주정을 마감했다. 


곱상하게 쪽진 머리에 코스모스 처럼 야들야들 가냘픈 외모의 윤아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어찌 저리 고울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눈보다 더 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는 손발이 닳도록 비는 정성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굿판을 돌기도 했으며 어느 때는 산행을 가느라 장기간 집을 비우는 적이 다반사였다.

고등학교를 중태 한 명선은 지 어미를 쏙 빼다 박았는지 변두리에 어울리지 않는 미모를 한껏 뽐내고 다녔다.

차림도 요란 했을뿐더러 무당엄마를 둔 것에 대한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오히려 돈이나 듬뿍 던져  주며  자주 떨어져 지내는 것이 덜 성가시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남녀공학을 다니며  줄줄이 못된 놈들과 엮이더니  밥 먹듯 정학처분이 내려졌다.

그 애의 주변에는 언제나  껄렁껄렁한 불량배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묘한 짓거리들을 일삼으며 마치 하녀 다루듯 홀대를 했지만 그런 것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사내놈이라면 환장을 했는지 이놈, 저놈 할 거 없이 살랑대는 눈웃음으로 다 받아주더니  끝내는 신당의 돈까지 싹쓰리하는 것으로 가출을 해 버렸다.

무당어미의 눈을 속여가며 겁도, 없이 신당에  숨어 들어 놈팽이들과의  추잡한 연애행각이 꼬리를 물더니 결국엔 졸업도 하기 전에 대형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딸년 앞날도 내다보지 못하는  주제에 돈 받아 처먹어가며 남 들 앞길 봐주는 꼴이  우습다는 안성댁의 비웃음이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아무리 사내 눔에 기갈들려도 그렇지, 겁대가리 없이 신당에 벌거벗고 자빠져 있는 년놈들을 내 한 두 번 목격한 게 아녀. 헤픈 딸년 단속도 못한 꼬락서니

하고는  쯧 쯧...잘 돌아가는 집구석이다"

유일하게  안성댁이 꺼리는 것이 바로 귀신이었는데 없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툭 하면 시루떡을 해 구석구석 놓아가며 비는 모습에서 진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웃거리면 기집년들 때문에 부정탄다 소리와 함께 눈을 흘기기 일쑤였다.

마치 신처럼 느껴지던 명선네를 흠 잡을 일이 없었던지

유일하게 갈구지 않더니만 그동안  참았던 것을 토해내기라도 하는 것 처럼 험악한 소리를 지껄였으나 상대는 눈도 깜짝 안 하며 무시를  했다.

아무때고 명선이 돌아오리라는 기대 속에  그 방은 언제나 환한 등대 같았고 빌고 또 비는 정성으로 밤을 새웠다. 신당 앞의 쪽마루에 걸터 앉아 긴 한숨과 함께 뻐끔거리는 모습이 수시로 눈에 들어왔다.

어둑어둑 해 질 무렵이면 다시 불을 밝혔고 온 집안의 불이 다 꺼지도록 우물가를 서성거렸다.

남 모르게 훔치는 눈물 뒤로 긴 한숨의 행렬이 끝없이 불거져나왔다.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눈이 멀어 애비뻘이나 되는 어른을 흠모한 죄로 낳은 자식이었 으나  죽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는 댓가외에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차마 죽이지는 못 하겠던지 , 아니면 아이를  찾겠다는

행패에 질렸던지 어느 날 옛다, 너 가져라...하는 식의 선심 쓰듯 던져진 아이 앞에서 이를 갈며 키워놨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목구멍에서 풀칠하느라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것이 무당의  자질인지도 모른채 뒤늦게 어찌어찌 신내림을 받아 기구하게 살아 온 가엾은 모녀였다.

석 달이 지나서야 헬쓱해진 모습으로 명선이 돌아왔고 그런 그녀를 버선발로 뛰어 나가 얼싸안으며

 통곡을 했다.

"아이구 가엾은 내 새끼, 어디 갔다 이제야 온 거여"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온 것도 아니건만 세상에 어미 없는 것 들은 어느 구석에 발도 붙이지 못할 만큼 반기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 어느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가득한 울부짖음에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우물가의 박 씨 아줌마를 내려다보며 두레박질을 하던 명선이 헛구역질을 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야무지게 얻어먹는 생선에는 불여시 모냥 새새거리던 안성댁이 비린내가 나네 어쩌네, 괜한 트집을 잡는 명선에게 맞장구를 쳤다.

지난 날,  박 씨 아줌마와의 싸움이 잔뜩 웅어리로 남아 있는 안성댁에게 명선의 트집은 절호의 기회였다.

어떻게든 한 번쯤은 푸닥거리를 하며 속을 뒤집어 놔야 지랄 맞은 성미가 후련해질 것 같은데 그 짓을 못 하고

자니 좀이 쑤시던 판국이었다.

"아니, 육시럴 놈의 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어디 빈정 상해 우물을 같이 쓸 수가 있나,  따로 파 쓰던가 해야지..

우물 팔 능력도 없는 주제에 말 같지도 않아 대꾸가 없는 건지, 이 쪽 이야 말로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건지

박 씨 아줌마는 아무 말이 없었고 다시 두레박질을 하던 명선이 앙칼을 떨며 웩웩거렸다.

박 씨 아줌마, 호랑이 안성댁, 안 채의 정란엄마 시선이 모두 쏠렸지만 명선은 뭘 봐욧, 사람  첨 보나.,괜히 난리들이야...하며 그 자리를 떴다.

한눈에 눈치챌 수 있는 뻔한 사실인데도 당사자가 너무 떳떳한 것에 오히려 보는 쪽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화제가 금방 명선에게로 쏠리자 안성댁이 더 신바람 나서 떠들었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이 애 밴 것이 무슨 벼슬이라고 고개 빳빳이 치켜 들고 저 지랄이여 지랄이...

옛날 같으면 신작로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일 일 이지 암...신당에 년놈들이 벌거벗고 자빠져 있는 거

내 한 두 번 본 줄 알어? 사달이 날 줄 내 진작에 알았지.

거침없이 떠드는 심한 소리에도 쳇, 별꼴들이야 .

지깢껏들이 뭐 보태준 게 있다고.. 큰  체를 하던 명선이

한가닥 마지막 예의인지  불러오는 배를 숨기느라 약을

먹었다는 말도 돌았고, 궁안산 꼭대기에서 굴렀다는 소문이 떠들썩했다.

무성한 말꼬리들이 시들해질 무렵, 우물가의 빨래 줄 에는 기저귀가 펄럭였으며 혼자 몸으로 명선을 기른 그 어미의 모습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다.

열여덟 살 꽃 다운 미혼모라는 이름표가 그들 모녀 에게는 아무런 근심도, 장애도 되지  않았고  어리디

어린 모녀에 대한 정성만이 눈물 겨울 뿐이었다.

  

지방 공사장을 전전긍긍하는 정식의 아버지는 사별로 남겨진 아들을 위해 재혼을 했으나 고약한 혹을

세트로 붙힌 꼴 이었다.

씨름선수 못지 않은 풍채에 이목구비가 사납게 생긴 아낙이 정란을 앞세워 들이닥치는 동시에 정식의 신세는 개밥에 도토리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

운동장만 한 방에서 밀려 손바닥만 한 다락방으로 쫓겨난 정식에게  두 살 터울인 정란의 괄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모녀가 배 두들겨 가며 퍼질러 먹다 남은 밥상에서 찌끄러기 찬밥을 눈물에 말아먹기 무섭게 삐걱거리는 다락문을 열고 저 만의  아지트로 숨어버렸다.

처음에는 다락방이 춥고 무섭기도 했지만 새엄마와 팥쥐동생의 구박에 비하면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히려 찍찍거리는 쥐 소리에서 위안을 받으며 안정을 찾는 장소로 바뀌어 갔다.

저 혼자만의 세상에서 빼꼼히 열린 쪽문 틈으로 음흉스런 눈길만이 번득일 뿐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원하는 것을 다 엿볼 수 있는  그곳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식의 퀭~한  얼굴은  아이의 순수 눈빛이 아닌, 잔뜩 구름 낀  색깔로 변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란네는  마실 나온 동네 아낙들을 꼬드겨 화투판을 벌이는 게 가장 큰 일과였다.

그때마다 정식은 숨소리도 죽인 채 다락방에 갇혀야 했고, 간간이 들려오는 정란의 쩝쩝대는 소리에

입 안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밤새 호롱불 밑에서 부리나케 뜨개질을 하던 명숙네와 정란엄마, 그리고 윤아 할머니가 화투판의 주 멤버였다.

건성건성 점심상을 들이밀기 무섭게 명숙네가 가장 먼저 자리 잡았고,  윤아야... 소리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운 자태만큼이나 사뿐히 윤아 할머니가 건너왔다.

커다란 덩치를  휘두르며 부침개 뒤집으랴, 화투 짝 뒤집으랴 정란네의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화투판은 해가 숨은 지 한참을 지나서도 그칠 줄 몰랐는데 안성댁의 귀에 익은 욕설과 불호령이 떨어져서야 할 수없이 뭉기적거리며 아쉬운  판을 덮었다. "  육시랄 년 들, 등 따시고 배 떼지 부르니  허구헌 날 노름질이여, 해 넘어가면 끼니들은

 해야 할 꺼 아녀..

안성댁의 조바심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 때문만은 절대 아니었다.

금쪽같은 3대 독자 영식을 염두해 두고  떠든다는 건 세상사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이구 이쁜 내 새끼, 어디서 이런 게 나온  거여.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땅에서 솟아났나.

어디서 나온 놈 인지 뻔히  알면서도 허풍이 가득한 소리에 침 발라 문구멍 뚫고 들여다보면 다 큰 영식을 물고 빠는 모습이 과간이었다.

뭘 우물우물 씹다가 입에 넣어주려 하면 영식이 드러워서 싫다는 볼멘소리를 했고,,그런 말조차도

서운한 안성댁은 얇은 눈꼬리가 새초롬해지면서  다시 새것으로  비위를 맞추곤 했다.

편물점을 중간에 끼고 솜씨 좋은 뜨개질을 하던 명숙 네가  집안일을 아예 어린 경숙에게 떠맡겨 버리자

중학교도 건너뛴 처지에 서러움만 더해갔다.

뜨개질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느라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장위시장까지 뜀박즬을  하다  서성이던 중학교

운동장에는  수 많은 꿈 들이 움틀대고 있었다.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처지라는 걸 실감하며 축 처진 채 터덜터덜 걷다 보면 어느새인가 마음이 텅 빈 상태가 되어 공중에 둥 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끔씩은 우물에 비친 모습이 너무 차량 맞아  차라리

저 속으로 풍덩 뛰어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 부치던 두레박질이 익숙해질 무렵, 거뜬히 물을 길어다 담벼락에 퍼 끼얹으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노랭이들이 스르륵 나가 떨어졌다.,

송충이보다  작고 가느다란 벌레들은 습기 때문 이었 는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벽을 꽉  채우며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우물물을 수없이 퍼다 끼얹어도 그때 뿐

이었고 그놈의 노랭이들은 다시 제자리로 기어 올라 수북이 포개져 있었다.,

그럴 때면 온몸으로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것 같아 몸서리쳤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악몽이었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현실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으나 그 어린 속을 아무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경숙이 여섯 살 되던 해 인가, 신혼의 작은 외삼촌이 잠시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구구단을 줄줄 읊던 신통력에 공부시킨다는 명분이었다;

사는 환경이 다르니  살가운 사이는커녕, 서로 소 닭 보듯 어색한 분위기 끝에 데려가긴 했으나 임신 중의 아내를 위한 설거지나 잔심부름을 하는 몸종  취급을 했다.  고사리 손으로 궂은일을 하면서도 제 때에 입안으로 들어오는 밥 숟가락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간혹 심심풀이 땅콩처럼 구구단을  시켰으나 그건 찢어지게 가난한 누이에 대한 아무런 배려도 아니었다.

부족함이 없는 외숙모를 보며 명숙이 입버릇 처럼 하던 말은 명숙네를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없는 집안도 아니면서  엄마도 외삼촌들처럼  공부를 시켰으면  고생 모르고 살았을 텐데 딸이라는 이유로 가르치지  않은 할아버지가 정말 원망스러워..

그 소릴 듣던 명숙네는  힘 없이 웃으며 공부를 했으면

니 애비한테 시집도 안 왔을 테고 그럼 니들도 없었을 텐데... 하는 농담을 일삼았다.

살림은 개판일 망정 다방면으로 박식하고 눈치 빠르고 정확한 명숙 네를 박사라고 놀리던 남편의 말이 헛된 소리만은 아니었다.

머리 좋고 재주 많은 걸 본인 스스로  인정은 하면서도 그 모냥으로밖에 못 사는 것이 팔자려니 여겼다.


경숙이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는 것이 어느 새  부자촌

까지 퍼졌던지 외삼촌이 협상을 오던 날, 손에는 난생

음 보는  과일 바구니가 들려져 있었다.

초라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바구니 속의 과일들이 형형색색 제 빛깔들을 뽐내며  잘난체를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감히 먹을,엄두도 못 내게 할 만큼의  반짝거림에

숨이 턱 막혔다.

딸만  둘 낳은 외숙모는 까칠한 성격처럼  얼굴도 까칠한 게 핏기라곤 없어 보였고, 무뚝뚝한  성격의

외삼촌이 무슨 거래를 하는지 연신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

둘 사이에 어떤 결론이 내려졌는지 명숙네는 외삼촌

따라 가 놀다 오라는 말을 했다.

졸지에  멋  모르고 따라 나선 경숙의 눈앞에는 어릴 적 상도동의 신혼방에 머물던 그 기억과는 전혀 다른

강남권의 떡 벌어진 주택이 펼쳐져 있었다.

조무래기 사촌들이 경숙을 따르며 좋아했으나  결국은 늦둥이를 임신한  외숙모의  식순이에 애 보기로 불려 간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모녀지간 아니랄까 봐 판박이로 닮은 둘째가

깐족거리는 게 얄미워  니 엄마 닮아 불여시야..

서운함에 했던 소리를 고자질하는 통에 흘겨보던

눈초리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느 저녁인가 밥상을  처리는데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뉴스의 메인이었고, 어린 나이에도 상을 차리던 손이 잠시 떨리며 말  할 수 없는 가슴 시림과 더불어  찬바람이 몰려왔다.


3대 독자 영식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도록 안성댁은 그림자를  자청하며 기를 쓰고 쫓아 다녔다.

상대를 불문하고 욕지거리에 어거지를 부리며  눈,

비가 오는 날은 맘대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추운 날은 춥다고 가지 말라더니 더운 날은 땀 빼며

그까짓데  뭐 하러 가느냐며  싸고 돌았다.

안성댁의 과잉보호로 인해 영식은 스스로 하는 게 거의

없을 정도로 나약한 것이 야무진 구석이라곤 눈 뜨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흔하고 쉬운 누나소리도 할 줄 몰랐으며 별것도 아닌 일에 질질 짜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할머니한테 이를꺼란 소리를 달고 살더니

나가서 얻어 터지고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꺼이꺼이

울어제꼈다. 그때마다 극성스러운 경숙이 부지깽이

부여 잡은 채 뛰어 나가 해결사 노릇을 했다.

금숙의 눈에는 다섯 살 터울의 그런 경숙이 한없이 멋

있어  보였고, 누구든지 주문만 하면 거뜬히 통일도 시켜 줄 만큼 못 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어린 금숙의 입에서 튀어 나온 황당한 소리는 경숙을 깊은 구렁텅이로  빠트리기에  충분 했다.

" 언니, 난 이런 못 사는 집의 식구가 아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야. 윗동네의 부자가 잃어버린  친딸을 찾고 있는데 그게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난 그럼 얼른 다 버리고 부자 따라 가서 잘 먹고 잘 살 텐데..

슬픈 눈빛으로 있지도 않은 허황된 얘기를 만들어내는

금숙을 보며   한창 소공녀에 빠져있던  경숙으로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상상이었으나  절대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맘 아파할까 봐 그냥 상상 속 에만 묻어두었던 바램 일 뿐 이었다.

걸핏하면 없애려다  실수로 낳았다는 소리를 일삼던

명숙네의 입 방정이 금숙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쇠 심줄보다도 더 질긴 년 인지 에프킬라를 먹어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던 터라 차라리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숙네의 자살에도 쓰였던 에프킬라의 효력이 결국은

낙태에도 미치지 못한 불찰이었다.


영식이 커 가자 호랑이 안성댁이 자매들 집으로 마실을 가느라 점점 방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보름에서 한 달씩은 족히 머물렀는데 명숙네 자매들은 살 판이라도 난 것처럼 덩실거리며 온갖 도섭을 했다. 보따리 바리바리 싸 들고 갔던  안성댁이

까탈스런 성미부리며 자매들 간에 다툼이라도 있는 날엔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흥겨운  춤 판을 깰 때가

종종 있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양손에도 나누어 들은 채로 전봇대의 그림자를 건너뛰는 안성댁의 모습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대같았다.

아비의 강압에 못 이겨 반갑지도 않은 마중을 나갔던

명숙과 정숙은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몰래 숨어 보며 키득대기 일쑤였다.

"언니, 할머니 좀 봐, 전봇대 그림자가 개올물 인 줄 알고  건너뛰네.. 호호 흐흐..

숨어서  훔쳐 보는 재미에 웃음소리마저 음흉하게

나올 망정 정말 너무 웃기고 신나던 순간이었다.

명숙 또한 짐을 받아들기는 커녕 까르르 소리 내어 웃으며 그 모습을 즐겼다.

"맨날 기집년들이라고 구박 해 봤자 바보 짓은 혼자 다 하고 있네.. 저 꼴 좀 봐라...

달밤에 전봇대마다 겅중겅중  건너 뛰는 안성댁의 뒤에서 새새거리던 명숙과 정숙은 할머니를  만나지

못 했다는 핑계를 대며 놀다 들어오기 일쑤였다.


마실 다녀 올  때 마다 둥근 깡통에 가득 담긴 각설탕

이며  손가락 반 만한 낱개 포장 빠다를 몰래 감추어

놓고는 영식의 밥에  참기름과 간장을 듬뿍  넣어 쓱쓱 비벼 먹였다.

옆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는 것 만으로도 거추장스럽고 싫었던지 금싸라기 3대 독자 밥 한 술 뜨는데 궁상떨지

말고 썩 꺼지라는 욕설은 지칠 줄도 몰랐다.

애지중지 숨겨 논 빠다가 녹아 버린 날, 어떤 년이 몰래

빼  처 먹고는 껍데기만 홀랑 남겨 놓았다는 억지에

모두들 눈을 흘기며 혀를 내둘렀다.

훔쳐 먹긴 커녕 구경도 못한 것에 누명까지 씌우니

아무리 윗사람이라지만 눈이 곱게 떠질 턱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임에도 안성댁의 벽장안에는

온갖 주전부리감이 동네 구멍가게 처럼 들어있었다.

모두 다 귀하디 귀한 3대 독자 영식의 몫 이었다.

명숙은 그것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안성댁이 마실 나가는 틈을 타서 몰래 벽장 문을 열고는 각설탕을

훔쳐먹는 일이 커다란 행복이었다.

정숙이까지 꼬득여 벽장안을 뒤지던 날 , 느닷없이 들이닥친 안성댁을 피하느라 벽장안으로 낼름 숨어버렸다. 구멍가게를 다녀 온 안성댁은 영식의

주전부리를 숨기느라 벽장문을 여는 동시에

에구 에구, 이 육시랄 년 들, 이  처 죽일 년 들...

하더니 길길이 뛰며 서슬이 시퍼래져 주저앉았다.

그 김에 후다닥 뛰어내린 명숙과 정숙은 혀를 쏙 내밀며

아더메치유...하더니 우물가를 냅다 가로질러  벌써

저 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귀신이 물어가다 놓칠 년 들, 뭐  처 먹을  게 있다고

벽장은 들 들 뒤지고 지랄이여 지랄이.

들어오기만 해 봐라 이 년들. 내 다리몽뎅일 다 분질러

놓을테다...하며 거품을 물었다.

그 날 밤, 각설탕의  달콤한 여운 대신 호랑이 할머니의

갖은 욕설을 양념삼아 서럽게 잠이 들었다.


전 날, 경숙아 노올자...불렀다가 기집년이 모자라서 보태려고 왔느냐며 호통을 당했던 영자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시쿤둥한 경숙이 이상했던지  등 떠밀며 재촉을 했다.

"진짜라니까,  니네 할머니한테 걸리면 또 욕 먹을까봐

너 부르려고 살살 들어가는데 벌써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더라. 아무튼 진짜 죽었다니까 빨랑 가 봐.

좁은 골목을 세개 지나는 동안  경숙은 그것이 꿈이 아니길 바랬고  사실이라고 해도 하나도 슬프지 않을

자신이 넘쳤다.

우물가를 지날 무렵, 명숙네의 아이고 아이고 하는

형식적인 곡 소리가  들리자 경숙은 순간 눈을 반짝이며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걷어낸 듯 싶었고, 무언의 압력에서 벗어난 것 처럼 마냥 신이 났다.

그것은 떠난 사람에 대한 슬픔의 곡성이 아닌, 앵무새

처럼 입으로만 쫑알거리는 명숙네와 닮은 꼴이었다.

장의사가 달아 놓은 노란 등이 무색할 만큼 집안은  순식간에 잔치분위기로 둔갑을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은 흥겹게 먹고 즐기라는

누군가의 명령이라도 떨어진 것 처럼 모두들 히히낙락

이었다. 명숙은 환한 표정으로 부침개를 부치며 집어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경숙은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베어 나와 실실 쪼개고 다녔다.

순둥이 정숙이 할머니 불쌍하다며 잠시 눈물을 글썽였으나  금방 호들갑을 떨며 특유의 철 없는

행동을 했다. 저  하나만 끼고돌며 감싸던 영식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닥치는대로 짜증을 부렸다.

손님이 올 때 마다 따라 들어가 구관조 처럼 아이고오를 몇번 흉내내던 명숙네는가장 밝은 표정으로 안성댁의

마지막을  치루었다. 살면서 그때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다시는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안성댁의 입을 벌려 쌀을 퍼 넣는 과정에서

정숙이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하자 명숙이 팔을 잡아

비틀며 말 했다. "잘 봐 둬. 우리만 구박하던 호랑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니까. 추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 주제에.  암팡지게 내 뱉는 명숙의 표정에  독기가 가득한 것을 보며  순간  시체보다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승길에 배 고플까봐  입에 물려주는 쌀 이나

잔뜩 불러 터질것만 같은 안성댁의 커다란 배 보다

명숙의 그 한마디가 더 섬찟하고 소름끼쳤다.

누렇게 뜬 얼굴로 막달의 임산부처럼 관 뚜껑도 닫히지 않을 만큼 빵빵한 배의 기억은 아주 오래오래

 꺼림직한 슬픔이었다.

루모나 파란 병에 하얀 위장약이라는 암포엘 엠을 달고 살던 안성댁은  65세의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안성댁이 떠난 후의 방 임자는 당연히 명숙네 세 자매 였는데 세상을 다 가진기분이 들 정도로 흡족했다.

밤새 수다를 떨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고, 다시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의 험한 욕설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너무 좋았다.

간혹 경숙이 자다 일어나 물끄러미 앉아 있곤 했는데

어디선가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착잡한 심정

이었다. 이제는 정말 귀신이 되어 버린 안성댁이 커다란

배를 쑤~욱 내밀며 귀신처럼 버티고 서서는  육시랄 년

자빠져 자지 않고 웬  청승이냐며 버럭 소리를 지를것만 같아 무서운 밤을 지새웠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기집년들 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호랑이 할머니와의 씁쓸한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떨쳐내지도 못 할 만큼 흉물스러운 저주가 되어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그런 악연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웃음이 저절로 실 실 나오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