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시장의 지게꾼인 지 씨 아저씨는 그 날 벌어 그 날 모두 술로 탕진하는 슬픈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통금이 가까울 무렵이 되어서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외치며 술냄새와 딸꾹질 소리가 온 집안에 퍼지도록 요란한 귀가를 했다.
그때마다 안성댁의 시들지 않은 욕설이 한바탕 보태졌지만 주정이 극을 달릴 만큼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육시랄 눔, 다 늙어빠진 게 뭐 더 놀겠다고 허구한 날 육갑을 떠는지 원...작작 퍼 마시고 여편네나 찾을 일 이지 날마다 술에 쩔어사네 그려.
이사오기가 무섭게 살랑거리고 다니며 온 집안의 속 사정을 파악했던 안성댁은 누구네 숟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 다 알고 있는 판국이었던 터라 마누라가 주정에
못 이겨 집 나갔다는 사실을 혼잣말처럼 되내었다.
우물가의 맨 마지막 손님은 항상 지 씨 아저씨였다.
딸꾹, 한 번에 두레박 퍼 올리며 반 쯤 쏟아진 그것을 텀벙 내 팽개치는 소리...그리고는 씻는지 어쩌는지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틈틈이 들려오는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그런 노랫가락이 결코 흥겨운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 다음단계는 꺼이꺼이 신세타령으로 이어지는 두어 시간가량의 쌩쑈가 남아 있었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던지며 문풍지를 뚫어버리는 것은 다반사였고, 에잇 퉤퉤...쉴새없이 뱉어대던 가래침은 멀리까지 튀어나갔다.
심난하리 만큼 정확한 순서대로 이어지는 주정이 명숙아비보다 훨씬 한 수 위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집 나간 마누라를 향해 온갖 욕설을
억세게 퍼붓다가도 임자, 보구싶어 돌아 와..
나 혼자 어떻게 살라구...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희미해질 무럽 크어억 하는 괴이한 코울음으로
주정을 마감했다.
곱상하게 쪽진 머리에 코스모스 처럼 야들야들 가냘픈 외모의 윤아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어찌 저리 고울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눈보다 더 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는 손발이 닳도록 비는 정성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굿판을 돌기도 했으며 어느 때는 산행을 가느라 장기간 집을 비우는 적이 다반사였다.
고등학교를 중태 한 명선은 지 어미를 쏙 빼다 박았는지 변두리에 어울리지 않는 미모를 한껏 뽐내고 다녔다.
차림도 요란 했을뿐더러 무당엄마를 둔 것에 대한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오히려 돈이나 듬뿍 던져 주며 자주 떨어져 지내는 것이 덜 성가시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남녀공학을 다니며 줄줄이 못된 놈들과 엮이더니 밥 먹듯 정학처분이 내려졌다.
그 애의 주변에는 언제나 껄렁껄렁한 불량배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묘한 짓거리들을 일삼으며 마치 하녀 다루듯 홀대를 했지만 그런 것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사내놈이라면 환장을 했는지 이놈, 저놈 할 거 없이 살랑대는 눈웃음으로 다 받아주더니 끝내는 신당의 돈까지 싹쓰리하는 것으로 가출을 해 버렸다.
무당어미의 눈을 속여가며 겁도, 없이 신당에 숨어 들어 놈팽이들과의 추잡한 연애행각이 꼬리를 물더니 결국엔 졸업도 하기 전에 대형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딸년 앞날도 내다보지 못하는 주제에 돈 받아 처먹어가며 남 들 앞길 봐주는 꼴이 우습다는 안성댁의 비웃음이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아무리 사내 눔에 기갈들려도 그렇지, 겁대가리 없이 신당에 벌거벗고 자빠져 있는 년놈들을 내 한 두 번 목격한 게 아녀. 헤픈 딸년 단속도 못한 꼬락서니
하고는 쯧 쯧...잘 돌아가는 집구석이다"
유일하게 안성댁이 꺼리는 것이 바로 귀신이었는데 없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툭 하면 시루떡을 해 구석구석 놓아가며 비는 모습에서 진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웃거리면 기집년들 때문에 부정탄다 소리와 함께 눈을 흘기기 일쑤였다.
마치 신처럼 느껴지던 명선네를 흠 잡을 일이 없었던지
유일하게 갈구지 않더니만 그동안 참았던 것을 토해내기라도 하는 것 처럼 험악한 소리를 지껄였으나 상대는 눈도 깜짝 안 하며 무시를 했다.
아무때고 명선이 돌아오리라는 기대 속에 그 방은 언제나 환한 등대 같았고 빌고 또 비는 정성으로 밤을 새웠다. 신당 앞의 쪽마루에 걸터 앉아 긴 한숨과 함께 뻐끔거리는 모습이 수시로 눈에 들어왔다.
어둑어둑 해 질 무렵이면 다시 불을 밝혔고 온 집안의 불이 다 꺼지도록 우물가를 서성거렸다.
남 모르게 훔치는 눈물 뒤로 긴 한숨의 행렬이 끝없이 불거져나왔다.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눈이 멀어 애비뻘이나 되는 어른을 흠모한 죄로 낳은 자식이었 으나 죽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는 댓가외에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차마 죽이지는 못 하겠던지 , 아니면 아이를 찾겠다는
행패에 질렸던지 어느 날 옛다, 너 가져라...하는 식의 선심 쓰듯 던져진 아이 앞에서 이를 갈며 키워놨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목구멍에서 풀칠하느라 나오는 대로 지껄이던 것이 무당의 자질인지도 모른채 뒤늦게 어찌어찌 신내림을 받아 기구하게 살아 온 가엾은 모녀였다.
석 달이 지나서야 헬쓱해진 모습으로 명선이 돌아왔고 그런 그녀를 버선발로 뛰어 나가 얼싸안으며
통곡을 했다.
"아이구 가엾은 내 새끼, 어디 갔다 이제야 온 거여"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온 것도 아니건만 세상에 어미 없는 것 들은 어느 구석에 발도 붙이지 못할 만큼 반기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 어느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가득한 울부짖음에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우물가의 박 씨 아줌마를 내려다보며 두레박질을 하던 명선이 헛구역질을 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