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 서서

<와일드>를 펼치다: 은퇴, 그리고 나만의 PCT

by 마음의여백


33년. 강산이 세 번 변하고도 남을 긴 시간 동안 한 직장에서, 단단하고도 숨 가쁜 삶을 달려왔다. 3천 명이라는 동료들과 함께 탄, 정해진 궤도를 따라 쉼 없이 달리는 열차였다. 그 안에서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고, 시련이라는 비바람을 맞기도 했지만,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낯선 정거장에 홀로 내렸다.


익숙했던 성취의 달콤함과 바쁜 일상의 소란스러움은 열차와 함께 멀어졌다. 내 앞에는 '새로운 인생 여정'이라는 무겁고도 막막한 표지판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제는 정해진 궤도도, 함께할 동료도 없다. 나만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막막함과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나는 오래전 영화로 접했던,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밀어두었던 책 한 권을 펼쳤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Wild)>.


4285km, 셰릴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 그리고 나의 거울


책 속의 셰릴은 26살, 엄마의 죽음과 이혼, 마약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구멍 뚫린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또는 직시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지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4285km의 험난한 여정을 홀로 걷기로 결심한다.


셰릴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수없이 멈칫거렸다. 그녀의 아픔에 마음이 저렸고, 그녀의 무거운 등산 배낭 '몬스터'를 함께 짊어진 듯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깊이 공감했던 것은, 그녀가 그 거대한 대자연 앞에서 느꼈던 근원적인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의지였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반면에 의지는 또 다른 의지를 낳는 법이다." (본문 중)


은퇴 후, 나 역시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33년 동안 쌓아온 익숙함을 버리고,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혼자 떠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셰릴은 말한다. 두려움에 굴복하는 대신 의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그녀의 말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여행하고, 책을 읽고 싶었던 강한 의지를 다시금 일깨웠다.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셰릴은 무거운 '몬스터' 배낭을 메었지만, 나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싶다. 그녀가 발끝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싸우며 대지를 이해했다면, 나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피사체의 순전함을 발견하며 나와 함께 존재하는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내가 꿈꾸는 나만의 PCT이다.


지금 나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다시 뒤돌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여정의 일부임을 안다. 셰릴이 PCT를 걷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여행은 시작되었듯이, 나의 여행도 은퇴라는 결심의 순간,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


<와일드>를 읽으며 내가 얻은 가장 큰 위로는, 삶의 신비로움과 예측 불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셰릴이 90일이 넘는 고난 끝에 '신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해냈다는 사실", 그리고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나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라는 담담한 수용이었다.


이제 낯설고 새로운 도전의 길로 들어섰다. 여전히 두렵고, 준비하고 공부할 것은 많다. 하지만 한발 한발, 마음을 다독이며, 또 때라고 생각하면 실행의 발걸음을 내딛으련다. 셰릴이 그 광활한 공간에서 "온 세상에서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도 뭐,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듯이, 나 역시 외로움과 두려움을 벗 삼아 나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다.


그 길의 끝에서, 가득 채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그리고 셰릴처럼 "이 세상에서 온전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금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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