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Fantasy IV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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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판타지 3을 이야기해 봤으니 파이널판타지 4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파이널 판타지 4는 파이널 판타지 3과 비교하면 정말 많은 것이 변화한 작품이다. 발매 기기가 패미컴에서 슈퍼패미컴으로 변경되면서 기기 성능이 대폭 오른 덕분인지 그래픽, 사운드 등의 표현범위가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기존에는 기술적인 한계로 구현할 수 없었던 많은 요소들이 추가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D 도트 그래픽에서 3D 폴리곤 그래픽으로 넘어간 6→7보다도, 턴제 게임에서 액션 게임으로 장르가 변경된 12 →13 보다도 더 크게 바뀐 것이 3→4라고 생각한다. 파이널 판타지 4는 어떤 게임이고, 이전에 비해 어떤 부분들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최대한 스포일러가 없도록 적었으나, 개개인에 따라서 스포일러라고 느껴질 수 있는 점 유의 바람)
파이널 판타지 앞선 시리즈들의 주인공은 개인이 아닌 파티 전체였다. 용사 4인이 모인 파티가 누군가로부터 세계를 구해 달라는 임무를 받고, 그 임무를 마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파이널 판타지 3까지의 주된 스토리였다. 사실상 스토리보다는 가이드라인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빛의 전사들이여, 세계를 위협하는 카오스를 막아주세요
살아남은 아이들이여, 세계를 위협하는 황제를 막아주세요
빛의 전사들이여, 세계를 위협하는 빛의 범람을 막아주세요
파이널 판타지 4의 주인공은 바론 왕국의 암흑 기사 단장 '세실 하비' 개인이다. 세실은 암흑기사들로 이루어진 '붉은 날개'의 단장으로서 마도사를 학살하는 임무를 마치고, 나날이 점점 잔혹해지는 국왕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뇌하고 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 한 마을에 가보라는 새 임무를 받고 죽마고우 '카인 하이윈드'와 함께 그 마을로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에 휘말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만약 파이널 판타지 4가 앞선 시리즈와 같았다면 플레이어가 캐릭터 이름을 정한 뒤 바로 크리스탈이 나타나서 한 마디 했을 것이다.
빛의 기사여,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를 쓰러뜨려주세요.
다행히도 파이널 판타지 4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스토리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세실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음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동시에 세실의 진실, 세계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진다. 다른 이도 아니고 굳이 세실이 세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크리스탈이 세실을 지목해서'와 같은 이유가 아니라 보다 당위성 있는 서사를 통해 제시된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도 이전에 비해 상당히 좋아졌다. 아무래도 기기 사양이 높아지면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늘어나서인지, 더 많은 대사가 있고 더 세세한 감정 묘사가 들어있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와 저마다의 성격을 가지고 이야기를 더욱 몰입감 있게 만든다. 딸을 잃은 복수귀, 대마법사를 꿈꾸는 쌍둥이 남매, 가족을 죽인 이를 용서하고 한 편이 되어주는 소환사부터, 정정당당한 전투를 즐기는 사천왕, 아군인 척하면서 끊임없이 배신을 일삼는 용기사, 막상 자기는 제대로 안 싸우고 도망만 다니는 악의 수괴까지 게임을 다 마치고 나면 인물 하나하나가 기억에 깊이 남는다.
그리고 이야기가 더욱 서정적으로 변모했다. 슬픈 상황, 기쁜 상황, 즐거운 상황, 놀라운 상황 등에 대한 인물들의 대사, 표정, 동작들이 더 확실하고 세부적으로 묘사되니 사랑, 슬픔, 우정, 동료애와 같은 감정들이 가슴에 더 와닿았다.
서사적인 부분 이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작 가능한 캐릭터의 수가 확 늘어났고, 작중 배경이 지상-지하-달로 이어질 정도로 스케일이 확 커졌고, 최종 전투를 앞두고 자유롭게 즐기는 서브 퀘스트가 추가되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변화는 Active Time Battle System(이하 ATB)이라는 시스템의 도입이었다.
기존 시리즈의 전투 시스템이었던 단순 턴제의 경우 플레이어 파티 턴→적 턴→플레이어 파티 턴→... 과 같이 명확하게 번갈아가면서 수를 놓는 식이지만 ATB는 일정 시간마다 적과 파티원 하나하나의 턴이 돌아오는 식이다. 각 캐릭터마다의 턴 시간을 계속 체크하고, 그때 그때 적이 놓는 수에 따라 나의 최적의 수를 유동적으로 변경해야 해서 턴제지만 속도감 있고 긴장감 있는 전투가 가능하다. 힐러 캐릭터의 턴이 올 때마다 광역 치유나 디버프 해제 마법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다른 캐릭터들로는 상황에 맞는 기술, 아이템을 계속 선택/사용하다 보면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로 시간이 후루룩 지나간다.
뭔가 좋아하거나 잘 되던 것이 있었는데 그게 변한다거나 바뀐다거나 하면 늘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변화를 하려는 마음가짐과 시도 자체는 항상 긍정적이지만, 변화의 결과물이 늘 좋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파이널 판타지 4도 시리즈 최초의 밀리언 셀러였던 파이널 판타지 3으로부터 변화하고자 했을 때,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긍정적인 시선만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를 통해 이전의 어떤 작품보다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냈고, 파이널 판타지 4에서 처음 도입한 여러 요소들이 비단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 시리즈들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