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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사과 한 개

by 황인갑

나는 5.18 때 광주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그때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영암의 이삼자는 고등학생이었다. 그의 이름이 특이하여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45년 만에 연락이 되어 전화로 통화했다. 오늘 아내가 영암 도갑사를 가자고 해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왕인박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도갑사를 간 후에 구림짬뽕에서 식사를 하려고 하다가 영암 농협 베이커리에 이삼자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없고 그의 아내가 있었다. 거기서 빵을 2만 원어치 사고 그가 있는 게이트볼 경기장 옆 농장으로 갔다. 그곳이 자기 농장이라고 하며 닭도 키우고 집도 있다. 계란, 양파를 주고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여러 개 따 주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그때도 멋있었는데 지금도 멋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상무대 영창에서 내가 사과를 젊으니까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 주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23살이고 이삼자는 20살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과를 몇 개 다시 돌려준다고 여러 개를 따서 주었다. 그는 석방 후 내가 써준 목포집 주소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는 살벌한 때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를 잡으러 형사들이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그리고 친척집을 찾아왔다. 제주도 그리고 완도에까지 왔다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삼자는 그때는 나와 나이차가 많은 줄 알았는데 3살밖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머리가 흰머리이다. 그의 고향은 영암이다. 아내도 영암이기 때문에 서로 잘 통했다. 그는 영암 활터에 살았다고 한다. 아내의 외삼촌도 잘 알았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비가 많이 오는 가운데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서울에서 일하다가 다시 고향 영암으로 와서 제빵 기술을 배워 농협에서 베이커리를 한다. 다른 기술자 한 사람을 고용하여 일을 하고 있다. 농협에 수입의 15%를 준다고 한다. 그는 늦게 결혼했다. 아내는 순천사람인데 이삼자와 다르게 깔끔하고 생활력이 강하게 보였다. 아들과 딸은 서울의 숭실대학과 대구의 계명대학 문헌정보학과에 다닌다고 한다. 그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자녀들은 기독교 대학이다.


5.18에 참여한 분 중에 생활이 넉넉한 분도 계시지만 어려운 사람도 많다. 그가 열심히 살고 있어서 기쁘다. 그때 있었던 기억들을 다 이야기하니 신기하기도 하다. 그때 있었던 사람의 이름은 모르지만 간질을 한 사람도 기억하고 있고 또 다른 광주의 인성고등학교 학생도 기억하고 있다.


그도 영암고등학교를 다니면서 5.18에 참여했다. 그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별 말이 없는 순진하기만 하다. 그런 친구가 5.18에 참여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45년 만에 해후하게 되었다. 아내는 우리의 만남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내가 준 사과 한 개가 빨간 사과 여러 개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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