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진 기억력을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예전에 봤던 영화의 내용이 도통 기억나지 않거든요.
다만 인상 깊었던 대사 한 줄 정도는 가끔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들은 대사 한마디가 당시 내 마음을 관통했었나 봅니다. 영화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한 줄 대사는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까요.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오
저 한마디는 예리한 화살이 되어 제 가슴에 정통으로 꽂혔었습니다. 당시에 참 멋있는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극복해 버린다'니까요
장애와 역경이 오더라도 뚫고 나가라는 말 같기도 하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승부를 보라는 말 같기도 하고, 목표를 정했으면 젖 먹던 힘까지 때려박으라는 말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 멋진 말처럼 살아 봐야겠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힘이 부칠 때 어금니를 꽉 깨물기도 해 보고, 기대만큼 안 풀릴 땐 두 주먹 다시 한번 불끈 쥐기도 하면서요.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할 때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면서 두 눈을 부릅뜨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내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아등바등 대며 살아봤습니다.
그런데요,
살다 보니 세상엔 이런 일, 저런 일, 요런 일, 별의별 일 다 겪게 되더라고요. 피똥 싸가며 덤볐는데 박살 난 적도 많고, 절절히 매달렸는데 처참히 버림받기도 하고요. 간절히 믿었지만 희망이 산산조각 부서진 적도 있었죠. 한계를 뚫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무릎 꿇은 날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삶이 불행했냐, 비참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 답하고 싶어요. 땀 흘린 만큼의 보상을 받은 적도 있었고, 기대 이상 결과가 나온 적도 있었어요. 가끔은 우연히 행운이 찾아온 적도 있었고요. 이따금 한계 앞에 주저앉았을 때는 또 다른 길을 안내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매번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제 삶도 그런대로 살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은요.
매번 꼭 한계를 극복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음,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일에도 나름의 의미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계 앞에서 엎어질 때까지 쏟아낸 피, 땀, 눈물의 경험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요. 실수하고 실패했더라도 최선을 다해보고, 한계를 인정했다면 실패의 흔적을 지워낼 만큼의 힘도 함께 쌓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파리 올림픽 결승 경기 몇 종목을 시청했습니다. 예전에 올림픽을 볼 때는 금메달을 딴 선수의 환희와 기쁨, 그 선수가 만들어 낸 결실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엔 승리의 장면만이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을 볼 때는 패배한 선수의 표정이 먼저 보이더라고요. 아쉬워하는 선수, 허탈해하는 선수, 비통해하는 선수, 눈물을 쏟아내는 선수... 다양한 표정의 패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금세 속상한 표정을 지우고, 활짝 웃으며 승자에게 축하를 건네더군요. 참 아름다웠습니다. 승자는 멋있었지만, 패자는 아름다웠습니다.
한계를 극복한 것은 멋있지만,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을 문득 해 봤습니다.
바람을 계산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일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모든 바람을 다 이길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거센 바람을, 굽이 돌아치는 바람을 인정하기도 하고, 계산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또한 충분히 아름답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