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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살이 8년 차의 회고

하노이에서 신혼 생활, 작은 사업, 코로나, 출산 그리고 육아까지

by 예스혜라



하노이 라이프 시작


2016년 8월,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덥고 습했던 공항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낯설고 이국적이었지만 무언가 불끈, 나를 설레게 했던 그 냄새


IMG_3146.jpg?type=w1 8년 전, 그때의 그 설렘



결혼한 지 일 년이 채 안되었을 때부터 시작했던 타지 살이는 역시 쉽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곳에 종종(아니 자주) 남편보다도 의지하는 친한 지인들이 곁에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순전히 우리 둘 뿐이었다. 남편과 피 터지게 싸워도 위로받으러 나갈 곳 하나 없었고, 어떤 결정이든 오롯이 남편과 나, 둘이서만 상의해야 했다. 화날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배고플 때나.. 모든 감정을 남편과 함께 공유했다.

뜨겁고 차갑고를 반복했던 남편과 나의 관계는 쇠 달금질처럼 지금의 우리로,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IMG_3147.jpg?type=w1 우리는 곳곳에 추억이 많다 여보야




아로마테라피 공방 오픈


대학교 졸업 전에 인턴으로 시작했던 바잉 MD 일을 대리를 끝으로 하노이로 오면서 퇴사하게 되었다. 일 년에 4번씩은 이태리 출장을 다니며 누구보다도 내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했었는데, 이 나이에 집에서 놀고먹을 수만은 없었다.




IMG_3138.jpg?type=w1 밀라노 어느 한 쇼룸에서



그즈음 회사를 다니며 아로마테라피를 배우고 있었고 어떤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노이에 아로마테라피 공방을 차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당시에 나는 실행력 갑이었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현지 부동산에 죽치고 앉아 넉살 좋은 척 묻고 또 물어가며 예산에 맞는 공방 자리를 구했고, 베트남어 하나 못하면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 공병, 화장품 원료등의 필요한 재료를 구했다. 인테리어도 업체 쓰지 않고 현지 사람을 한 명과 함께 인테리어 색상 고르고, 손으로 도면 그려 넘기고, 타오바오에서 소품 직구하고..

그렇게 하노이에 빈호공방을 탄생시켰다. 약 2년간 공방을 운영했고 그간 필요한 자격증을 더 취득하며 바쁜 하노이 생활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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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부터 화장지까지, 내 손으로 하나하나 꾸렸던 공방




첫 출산 그리고 팬데믹


평일에는 공방을 운영하고, 주말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하노이 구석구석을 누볐다. 남편이 휴가를 받을 때면 근처 나라들을 하나씩 도장 깨기 했다. 만족하지 않을 것이 하나 없었던 날들이었다.


IMG_3142.JPG?type=w1 태국 여행 중


그러던 중에 문득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연애 6년 차, 결혼 3년 차 도합 9년을 함께한 남편과 나에게 그저 자연스레 찾아온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임신을 계획하며 운영해 오던 공방을 접게 되었고, 계획한 지 6개월 만에 하나님께 첫 딸을 선물 받았다.


IMG_3139.JPG?type=w1 2019년 12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첫 딸을 출산했던 2019년 12월,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팬데믹도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코로나가 앞으로 우리 가족의 3년을 이렇게 크게 뒤흔들 줄은.




코로나 이산가족


첫 딸인 유주를 한국에서 출산하고 하늘길이 막혀버렸다. 그렇게 유주는 10개월까지 아빠 없이 친정에서 키워졌다. 유주가 10개월이 되어서야 특별입국으로 큰돈을 들여 겨우겨우 베트남에 입국할 수 있었다.



IMG_3140.JPG?type=w1 방호복 입고 비행기 타야 했던 코시국



하노이에서 아빠와 함께 할 수 있음에 좋았으나 코로나에 강경 대응했던 베트남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2021년 팬데믹이 정점이었던 그 시기, 베트남 정부는 아파트를 봉쇄했고 생필품을 사는 마트 출입마저 통제했다. 통행증을 끊어야지 외출이 가능했고 대부분의 아빠들은 회사에서 숙식했고 집에 두 달여간 들어오지 못했다. 난 그 와중에 둘째를 임신했다. (전쟁통에도 아기 낳는다는 말.. 공감합니다.)


둘째 신생아 시절마저 아빠 없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 현지 출산을 계획했는데 베트남의 살벌했던 코로나 대응 정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둘째마저 한국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둘째는 탯줄도 친정엄마가 잘라주었고, 역시 6개월이 될 때까지 아빠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IMG_3145.JPG?type=w1 친정엄마와 두 아이 키워냈지



두 아이를 낳고 하노이로 다시 돌아왔을 때 코로나는 암묵적으로 종료되었다.





완전한 가족, 되찾은 일상



긴 시간, 코로나 이산가족이었던 우리 가족은 네 명이 완전체로 함께 지내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IMG_0754.JPG?type=w1 우리 네 가족 첫 여행



그리고 어느덧 2024년 겨울이다.

2년 전 팬데믹이 끝날 무렵 하노이로 입국했을 때 겨우 4개월이었던 둘째는 얼마 전 세 돌 생일파티를 치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육아의 현장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치열하듯, 나 또한 아이 둘과 함께 치열한 2년을 보냈다. 지금까지도 내가 사는 이곳이 한국인지 하노이인지 되새김할 시간도 없이, 나는 여전히 치열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KakaoTalk_20241205_142103452.jpg 두 살 터울 남매





어느덧 하노이살이 8년 차



요즘 남편과 차를 한 대 사볼까 얘기 중이다. 그래서 요 며칠 현지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공공기관들을 방문하면서 내가 사는 이곳이 베트남이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면허증 발급에 필요한 건강검진을 하는데 스무 개가 넘는 모든 항목을 청진기 하나로 모두 Yes로 체크, 색맹인 사람도 30만 동을 더 얹어주면 Pass로 체크, 번호표 발급받는데 줄 서지 않고 일제히 우르르 기계로 달려드는 모습.



오늘 아침에도 이 나라의 종잡을 수 없는 시스템에 헛걸음을 두 번이나 했고, 4시간을 무작정 대기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질려버린 마음에 답답한 마음을 카톡방에 한껏 풀어내고 근처 가까운 카페로 너덜너덜 들어오는데.... 웬걸, 카페가 너무 아늑하고 예쁘잖아. 그래 이 나라가 주는 이 겨울 분위기, 내가 참 좋아하지. 커피 빵 다해서 4천 원인 이 물가에 내가 살지.




KakaoTalk_20241205_142413383.jpg 호안끼엠의 로컬 카페




질린다고 말하면서도 이곳에서 8년을 열심히 애쓰고 적응하며 살아왔다.

남은 하노이의 삶이 좌절보다는 기대가 먼저 앞서는 것을 보면, 나는 생각보다 하노이를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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