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 Jan 25. 2024

나의 붉은 대추 한 알

    

지천명.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뜻, 나이 50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지식백과에는 나와있다.



2024년 1월.

지천명의 나이를 먹은 내가 너무나 낯설다.

나는 정말 하늘의 명이 무엇인지 이치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걸까     


매일 새벽 5시 20분 알람소리에 일어나 6시면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다

차가운 겨울 하늘에는 달이 떠있고, 가로등 불빛이 아니면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있는 새벽. 

차갑고 어스름한 새벽에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는 내가 그래도 부지런히 열심히 인생을 살고 있구나 싶어 안도한다.     


정류장에 차례대로 정차하는 버스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부족한 아침잠을 채우려는 듯 대부분이 졸고 있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중에도 최고인 버스는 퇴근길의 버스를 연상케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탄 버스이다.

서있기도 힘들어 보일만큼 많은 사람들이 좁은 버스 안에서 새벽부터 부대끼며 서있다.     


이 새벽에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몇 시에 버스를 탔으며,

어디를 향해 달리는 걸까

이들의 직업은 무엇이길래 이 시간에 출근을 하는 걸까

아주 잠깐 정차하는 버스 안을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살피게 된다

다들 피곤한 얼굴에 무표정한 모습이다     

이제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 나 자신도 있다는 것에 안도감보다는 

서글픔이 더 크게 찾아온다.     


내가 타는 버스는 다행히도 대부분 앉아 갈 수가 있다.

나는 히터가 나오는 버스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짧은 거리지만 부족한 잠을 채우고 싶다.     

하지만, 재래시장을 거치면서 커다란 보따리에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의 대화소리로

버스 안은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져 눈을 뜨게 된다.

등이 굽고, 관절이 아파 버스계단을 오르기도 쉽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낑낑거리며 버스를 타고는 

오늘의 농산물 시세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한다


저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지금의 모습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럼 나의 노후는 어떤 모습일까...

나름 전문직이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몸이 아프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처지는 저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고,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럼 큰일인데 어쩌지' 

걱정부터 하는 현실이 또  서글프다     


버스가 자재 파는 좁은 골목 모퉁이를 돌면

내가 늘 눈으로 찾아보는 작은 가게가 있다

그 가게의 유리벽에는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처음 이 시를 읽었던 날 나는 누가 내 후두부를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첫째는  지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시 몇 구절로 인생의 이치를 담아낸 시인에게 

감탄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에게는 붉은 대추 한 알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내 마음에 태풍과 천둥 벼락이 내리치는 느낌이었고

마음이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지천명이라는 나이를 먹고서도

나에게는 이렇다 할 나의 열매가 없다.     

결혼을 해서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직장도 있지만

오롯이 나를 위한 나만의 열매가 없다는 것에 큰 슬픔을 느꼈다     


맞벌이로 허덕 거리며 살아오면서  낡은 아파트이지만 내 집 장만하고 

늘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동동거리며 자식 키우느라

문득문득 떠오르는 나의 욕구에는 고개를 애써 돌렸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도...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며 앞만 보며 달리고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이 있음에 감사하며 살다가

여기저기 조금씩 이상신호를 보내오는 건강문제로 병원을 다니고

그렇게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 인생이고 순리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건 아니야'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내가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이리저리 검색을 하고

사람들도 더 자주 만나보고

운동도 시작했다

그러나 공허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계속 밀려왔다     


고민 고민하다 책을 읽기로 했다

비우기만 할 뿐 채우는 것을 잊어버려

속이 텅 비어버린 나를 책으로 채워야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소설책에 빠져 고전명작부터 시작하여 현대소설까지 밤을 새워 읽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책만 펴면 잠이 오는 처지가 되었다     


제일 먼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주문하고, 

집 책꽂이에 먼지가 쌓인 채  내용이 가물거리는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매일 퇴근하면  한두 시간이라도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필사도 매일 30분 하기로 마음먹었다

관심 있던 학원을 알아보고 상담을 받고 나니(내 나이 또래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내 속에 무언가를 채우는 느낌에 오랜만에 설렌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조금씩 나를 깨닫고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나의 대추 한 알이 무엇인지     


더 빨랐다면 좋았겠지만

더 늦지 않아서 더 좋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꿈꿔본다

나도 언젠가 붉게 잘 익은 나의 대추 한 알을 가질 수 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