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약발의 증거
그러나 수학점수가 오르지는 않더라.
약의 용량은 아이 체중의 5분의 1 정도의 너댓살 아이에게 맞는 용량이라고 했다. 일단 부작용 여부를 보며 조금씩 올려야한다고. 다음날 아침 약을 먹고 학교에 갔고, 과연 어떤 효과가 있을지 궁금한걸 꾹꾹 참으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때 아이가 말했다.
"하루종일 방금 샤워한 것 같았어요."
조슈아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면 항상 아이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아니 숙제하라니까 왜 방으로 안 들어가고 욕실로 들어가냐"며 놀리곤 했는데, 이제와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는 샤워를 해야 좀 정신이 맑아져 한두시간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나간 오늘은 하루종일 방금 샤워한 것처럼 정신이 맑았다고.
그 다음날 저녁에는 또 다른 표현을 했다.
"낮에 가만히 있는데 아무런 생각이 안 나고 머릿속이 조용해서 너무 신기했어요."
약을 먹기 전에는 아무일 없이 가만히 있게 되면 온갖 잡생각이 몰려들어 늘 머릿속이 복잡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중에도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생각 때문에 자꾸 흐름을 놓치고 그러다보면 어느덧 몇시간이 흘러가버리기 일쑤였다고.
그동안 다른 친구들은 본인이 원할때면 언제든 조용한 독서실에서 집중할 수 있었다면, 조슈아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하루종일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 공부란 걸 해보겠다고 혼자 사투를 벌여왔던 것이다. 그 와중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거꾸로 짐작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약을 먹으며 아이는 조금씩 달라졌다. 일단 말이 전보다 많아졌고, 눈빛이 똘똘해졌다. 뭐든 물어보면 "글쎄요", "몰라요"만 하던 아이가 논리적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 다니기 시작한 수학학원 선생님 수업이 어떠냐고 물으니 "전에는 함수와 그래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 선생님 설명을 들으며 이제야 그 둘의 관계를 알겠더라구요."하는 것이다. 세상에나, 나는 우리 아들에게 무언가를 묻고 나서 이렇게 긴 대답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진짜 웃긴 일도 있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지 한달 반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카드에 돈을 넣어준지 얼마 안 지났는데 돈이 떨어졌다며 또 보내달라고 하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얼마전 학교에서 수련회를 갔을때 간식을 챙겨가지 못해 친구들이 싸온 과자를 먹는다길래 '너도 매점에서 카드로 뭘 좀 사서 친구들과 함께 나누라'고 했는데 혹시 그때 빵셔틀이라도 당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카드내역을 보자고 했는데 아이가 자꾸 안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걱정이 되어 억지로 까보았더니, 세상에나 지난 한 달여간 스마트폰 게임으로 삼십 만원이 넘는 돈을 결제한 것이었다.
게임이라고는 걸어다니며 포켓몬 잡는 것 밖에 못하던 아이였다. 아이들이 많이 하는 게임에 관심이 생기면 게임을 하는 장면을 중계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본인은 순발력이 떨어져 그런 게임은 못 한다고 했었는데 약을 먹고 순발력이 좋아지자 자신이 직접 게임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쪽에선 아빠가 호되게 혼을 내고 나는 다른 방에서 넌즈시 웃었다. 약발이 정말 들긴 드나보다.
한바탕 야단을 맞고 난 후 아이와 조용히 마주했다. '공신폰(공부의 신 폰. 스마트폰이지만 통신기능을 차단한, 사실상 전화와 문자만 되는 깡통폰)으로 다시 바꾸고 게임을 딱 끊을래, 아니면 엄마와 적정선에서 약속하고 조절하며 게임을 할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지금껏 해왔고 게임 좀 하는 것이 죄도 아닌데 네가 조절하며 하겠다면 엄마도 억지로 못하게 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아이는 울며 '공신폰으로 바꾸겠다. 딱 끊겠다'고 했다.
'그래 조슈아야. 우리 한달전에 병원에 갔던 날 약을 받아들고 나올 때의 너의 눈빛을 엄마는 기억해. 정말정말 공부를 잘 하고 싶고 이 약이 그런 너의 노력을 뒷받침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던 네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고 절박했는지 엄마는 알거든. 약까지 먹으며 한번 해보려고 이제 막 시작했는데 이런 게임이 뭐라고 여기에 네 에너지와 시간을 쓰겠니. 우리 독하게 맘 먹고 한번 해보자'.
'네'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조슈아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약을 먹어서 집중하는게 수월해졌다고 하루아침에 수학 성적이 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도 의도대로 무언가에 몰두하고 열심을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늘 어둡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가득한 아이로 바뀌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