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보고 쓰기
안녕하세요, 독자님.
욱림솔훈의 유림입니다.
3월의 첫 주를 잘 보내고 계신가요?
날이 풀린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쌀쌀해서 결국 패딩을 꺼내드는 계절입니다.
<2021년 올해의 작가상>을 보고 적은 에세이 시리즈.
오늘은 저의 글로 인사드립니다 :)
º 주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21 올해의 작가상>을 보고 쓰기
따로 같이 함께 | 대욱
관람 너머 | 유림
빌린 하루 | 은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 | 영훈
관람 너머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좋아한다. 비가 내려도 해가 비쳐도 예쁜 벽돌 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기자기한 상점가,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걸으면 작은 잔디밭 너머로 보이는 국현. 줄임말도 단정하게 국현. 그 줄임말을 흥얼거리며 큰 비가 와도 쓸려내려가지 않을 단단한 건물과 돌담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에 안정을 느끼며 흐린 날씨에 가라앉은 기분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출입구가 제한되어 들어가는 길을 조금 헤맸다. 나를 발견한 솔이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짙게 그림자가 진 유리창 너머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의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조금 낯설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닌데도. 아주 친해도, 가끔 상대가 낯설어 보이는 순간이 있다. 미묘한 기분에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갔을 때 맞춰입은 것처럼 검은색을 걸친 세 사람이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서야 나도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가볍게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국현 로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지만, 다행히 우리가 보려는 전시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궁금해한다. 나와 다른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나와 당신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은 지. 오늘 우리의 만남도 그러한 이유로 이 전시장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공간을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둔 작가의 부재 속에서 작품들과 눈을 맞추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어두운 조명과 화면들과 사람 혹은 사물 그리고 이야기들. 다행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생각을, 시간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구나, 서로에게 서로가 관심이 많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흰 벽으로 가득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올해의 작가상 2021 - 오민 작가의 <헤테로포니>
어두운 거대한 방에 ㄱ자의 모양으로 스크린 4개가 놓여있었다. 혼자 다른 각도로 놓인 스크린 하나는 촬영하는 스탭들의 모습을 나머지 3개의 같은 선에 놓인 스크린은 배우의 얼굴을 다양한 각도로 담아냈다. 연한 노란빛 벽지 앞에 연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밀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담담하게 보았다가 불안하게 보았다가 고개를 틀어서 보기도 하고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멍하게 나를 응시하기도 했다. ㄱ자의 모양으로 꺾어진 반대편의 스크린에선 그 여자를 촬영하는 카메라를 든 여자와 남자가 번갈아 등장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가면 노란 벽지 앞의 여자의 모습도 따라 내려갔다. 비틀린 공간에서 오직 카메라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세 개가 된다면, 하나의 피사체와 주변의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이런 광경일까. 같은 영상처럼 보이지만 같지 않은 3개의 영상을, 그리고 그 영상을 찍는 사람들의 영상을 전시장 의자에 앉아 오래 바라보았다. 3개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 그 공간에 오래 머물렀을까, 아니면 단순하게 재생되고 있는 영상의 색감이 무척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걸까. 다만 오직 화면만이 밝게 빛을 내던 공간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탐구해도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타인을 언제나 읽을 수 없겠구나. 늘 어렵겠구나. 전시장에서 마주한, 내가 3개의 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사람들, 애처로운 표정으로,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자와 그 여자를 촬영하던 사람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오후에 나눈 이야기
한참 돌아다니며 지친 다리를 이끌고 우리는 두부집으로 들어갔다. 포슬포슬한 냄새가 나는 밥집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버섯 두부전골과 도토리묵을 먹으며 전시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물었다. 다들 건강하죠, 일은 어때요, 취업 준비는 어때요, 이제 주변에서도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요,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밥을 먹고 골목과 계단을 조금 걸어 도착한 흰색과 푸른색으로 가득한 카페에서 우리는 4월 메일링에 들어갈 영화 <더 리더: 책읽어주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덤 앞에서 깨달았다는 점이 감동적이었어요.
그런 장면이 들어가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이해해 보려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 욱림솔훈의 대담 중 일부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속 한나
집에 가는 길에는 전시장에서 본 밀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영화 속 여주인공 '한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3개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아도 지금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전시장의 그녀.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욱솔훈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도 끝내 알 수 없었던 인물 '한나'. 한강을 가로지르며 창문에 비친 빛들을 보다가 문득 둘이 닮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사실 닮은 것은 그 두 사람을 보는 나의 시선이다. 마치 3개의, 그보다 더 많은 눈을 가진 것처럼, 나는 헤테로포니 속 그녀를 영화 속 한나를 보듯 바라보았구나. 어쩌면 헤테로포니 속 그녀의 기분을 내가 알 수 없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또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으므로.
문득 두려워져서, 나는 오늘 만난 욱과 솔과 훈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서로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솔은 머리를 기르는 중이라며 어느새 턱 선에 닿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웃었다. 욱은 일 이야기를 하며 눈을 빛냈고, 훈은 탐날 정도로 멋진 안경을 쓰고 늘 하던 것처럼 사진을 찍었다. 그 속에서 많이 웃었고 즐거웠는데, 내가 또 전시 속 그녀를 보듯, 한나를 보듯 그들을 멀리서 바라만 본 일은 없었을까. 서로를 배려하는 거리에 시간이 쌓이면, 가끔 오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거리를 애매하게 서성이다가 오해를 하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슬프게도 이런 기우는 잘 맞아떨어진다. 집에 도착한 후 단톡방에 훈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그가 집에 돌아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단키트를 확인해 보니 양성 표시가 떴다고. 생각해 보면 훈이 해가 진 후부터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일찍 집에 보내줬어야 했는데 신이 나서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아 미안함이 앞섰다. 내가 눈이 세 개가 되어도 이런 일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잡아낼 수 있었을까. 눈이 백 개가 되어도 아마 늘 어렵겠지.
전시 속의 그녀와 영화 속의 한나처럼 멀리 있지 않은 당신들에게 좀 더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문득 밀려오는, 타인이기에 찾아오는 낯섦을 이겨내고 다정히 이름을 부르며 '잘 지내?'라고. 어쩌면 눈썹 한쪽을 장난스레 올리며 '왜, 안 괜찮아 보여?'라고 되물을 당신과, 눈이 가늘어지게 웃으며 응,이라고 할 당신과, 작은 한숨과 함께 잘지내야지,라고 말할 당신까지. 우리는 너무 다르고, 아주 멀고, 서로를 완벽히 읽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관람하는 것을 넘어 기꺼이 자신의 유리창 안에 둔, 그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어딘가에 남겨두지 않으면 영영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여기에 적어둔다. 분명 두 개뿐인 나의 눈으로는 당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잘못 읽어내거나, 어떤 날은 무엇도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에게 내가 필요한 때에 늦지 않고 품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당신이 손을 내밀었을 때 내가 쉽게 잡히는 사람이기를.
ps. 글을 다 쓰고 보니, 우서기에 실린 영훈의 글이 떠올랐다.
"입이 만개라면 눈은 억개쯤 필요할지도 모른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 나무에 새겨진 나무테의 눈을 바라보며 동시에 중국의 수족관에 있는 듀공의 눈을 볼 수 있다면 언제나 완전한 구처럼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를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 [우리는 서로에 기대어] 중 상승기류
가장 많은 수로 백을 떠올리는 나는 만과 억을 넘나드는 훈의 방대한 세계에 놀라고 만다. 어쩌면 우리의 눈이 억개라면, 그렇게 거대한 수에 담긴 타인을 읽고 싶은 마음이라면 우리는 서로를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록도록, 진심으로 굴러가는 억 개의 눈동자들이 조금은 무섭기도 애처롭기도 하다.
2022. 04. 07
<같이 전시를 보고 쓰기 - 관람 너머>
유림 쓰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