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보고 쓰기
안녕하세요, 독자님. 유림입니다.
날이 조금씩 더 따뜻해지고 있네요.
이제 길을 걸으면 꽃망울이 맺힌 가지들을 만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산책이 늘었는데요,
사실 산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 욱림솔훈 메일링의 주제이기도 해서랍니다...ㅎㅎ
<2024년 욱림솔훈 1호>는 산책에 대한 주제로 12편의 이야기를 구독자님들께 보내드리려 합니다.
3월 20일 오늘부터 3월 30일까지 구독자를 모집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321872
그럼 다시 글로 돌아와서
오늘은 2021 올해의 작가상 시리즈 세번째, 은솔의 글을 전해드립니다.
º 주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보고 쓰기
따로 같이 함께 | 대욱
관람 너머 | 유림
빌린 하루 | 은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 | 영훈
빌린 하루
<qbit to adam>(2021) - 최찬숙
어떤 이미지는 잊을 수 없어서, 잊지 말아야 해서 아주 오래 기억으로 남는다. 글벗들과 함께 보러 갔던 전시에서는 30분이 넘는 긴 영상 작품에서 잠시 등장했던 페니텐테스(penitente)의 형상을 잊지 못했다. 페니텐테스는 안데스산맥의 빙하 지역에서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얼음 형상이다.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스페인어로 참회하는 형상의 눈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이 얼음 기둥은 2미터에서 5미터 높이까지 기울어진 형태로 날카롭고도 촘촘하게 태양을 향해 뻗어 있다. 그저 신비로운 현상의 광물이라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참회라는 텍스트와 맞물린 페니텐테스를 보며 나는 잠시 그 얼음처럼 무릎을 꿇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후 위기를 ‘위기’로 인지하고 다른 생명의 고통을 착취하지 않는 비거니즘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일상의 어느 순간에서든지 자주 무거워졌던 것 같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들이 늘었고, 원인과 책임에 대해 생각했다. 참회하는 얼음 형상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석 달 전쯤 보았던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인간이 미안해…백신 위해 푸른 피 뽑히고 죽어가는 투구게”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 세균이 들어오면 혈액이 응고되는 반응을 보이는 투구게의 피를 시험약이나 백신의 오염도를 확인할 때 사용해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고 마음껏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지난 2년 동안 투구게의 푸른 피는 백신을 만드는 과정에 얼마나 이용되었을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잔인하게도 심장에서 30%가량의 피를 빼내고 72시간 안에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지는 투구게는 이미 목숨을 잃은 채 바다로 버려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진 속 푸른 피를 보며 헛구역질이 났고, 적절한 듯 적절하지 않은 “인간이 미안해”라는 말이 더욱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동안 모르고 지냈을 뿐, 코로나19뿐만 아니라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투구게의 푸른 피를 이용한 실험은 계속됐을 것이고, 덕분에 인간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뉴스를 본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간의 행동이 끔찍하다고 생각할지 혹은 생각하고 잊어버릴지 두려웠다. 나 역시도 투구게의 고통을 착취해 삶을 연장해 온 한 인간이지만,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는 듯이 투구게의 고통쯤은 잊어버리고, 인간을 위한 희생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 옳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던 것들이 한 생명을, 같은 인간을, 이 지구를 착취하는 형태로 내게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진다. 숲을 태우고, 동물을 내쫓고, 펼쳐진 땅에 인간이 먹기 위한 가축을 기르거나 도시를 지으며 문명이 만들어졌다. 자동차를 타고, 마음껏 육류를 섭취하고,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며 어디서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시대에서 인간의 생산 활동은 인간의 터전을 파괴하는 굴레가 되었다. 지구의 온도가 상승할 만큼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으며, 그 피해로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며, 지대가 낮은 지역이 물에 잠기고, 잦은 폭염과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2022년을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살기 위해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이 지구를 착취하는 형태로 이뤄지며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와 미래를 살아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다.
더욱 선명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인간이 착취하며 파괴하고 있는 것은 지구와 지구를 살아가는 생명체가 맞지만, 인간이 위협하고 있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인류라는 점이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인간이 사라져도 지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책 <인간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는 가정하에 지구의 미래를 예측한 모습을 참고하면, 단단해 보였던 도시의 건축물은 아스팔트 틈 어디든 뿌리를 내리는 식물에 의해 벌어지고, 곰팡이가 내벽을 무너트리고, 철근은 내리는 비에 부식된다. 수십, 수백만 년에 걸쳐 플라스틱을 분해할 수 있는 미생물이 진화하고, 암석의 순환으로 이산화탄소 농도는 인류 이전으로 서서히 감소한다고 한다. 최초의 도구였던 석기도 집도 인공위성도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이 땅의 돌과 나무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그 어떤 지구상의 생명체보다 많은 것을 지구에 빌려왔고, 인간이 만든 것은 오직 인간이 지구에서 조금 더 자라기 좋은 환경뿐이었다는 것을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최찬숙 작가의 <qbit to adam>이란 작품에서 채굴이 끝나고 버려진 칠레의 구리 광산을 드론으로 촬영한 장면을 보았다. 구리를 채굴하고 운반하던 길로 추정되는 선들이 구불구불하게 엇갈린 주황빛의 땅은 근육을 닮아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것이라기보단 사막의 모래바람에 살가죽은 벗겨지고, 힘줄이 강렬한 태양 빛 아래 선명하게 말라가는 미라의 팔을 떠올렸다. 영상에서는 계속해서 몸과 소유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의 몸은 나의 것,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러나 죽으면 이 땅에 묻히는 것. 그렇다면 수많은 몸이 섞인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이 구절을 떠올리며 인간은 결국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으로 살아가며 자주 잊게 된다는 것도. 땅을 경제적 수단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인류는 이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인류가 떠나간 뒤 버려진 땅이 대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땅은 점점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같은 땅에서 태어난 생명을 공생이 아닌 착취와 정복으로 대한 인류에게는 풍요로운 바다와 비옥한 토양, 맑은 공기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이미 수많은 연구자들이 이 땅의 언어를 전하고 있다. 인간이 착취한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느끼고, 내일을 걱정하는 불편함을 느끼며 이 땅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깨닫는 인간들이 늘어가는 것이 내게는 큰 다행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이 땅의 것을 착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무력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은 끝이 아니라 생존을 말하고 싶다. 지구에 빌린 하루를 더 괜찮게 살아낼 방법은 분명 존재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매 순간 자신과 다음 인류를 위해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영상을 보았던 전시 공간은 바닥이 구릿빛 마감재로 둘러싸여 있었고, 스크린 속의 영상도 나의 그림자도 바닥에 상으로 맺히는 이미지들은 온통 흐릿하게 보였다. 이 땅이 품은 억겁의 시간 중에 인류의 생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선명할 수 있을까. 인류가 빌린 삶이 끝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자신이 태어난 땅과 너무 멀어지지 않은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빌린 하루하루는 결국 내가 돌아갈 땅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이라고 믿는다.
밤하늘 아래의 참회자들
페니텐테스(penitente) - 위키백과
2022. 04. 09
<같이 전시를 보고 쓰기 - 빌린 하루>
은솔 쓰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