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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림솔훈 Mar 27.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

<2021 올해의 작가상>을 보고 쓰기


안녕하세요. 유림입니다.

오늘은 따뜻한 날씨에 오랜만에 패딩이 아닌 자켓을 꺼내 입었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을 다잡으며 전해드릴 오늘의 글은 

<2021 올해의 작가상>시리즈의 마지막, 

영훈의 에세이입니다. 




º 주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보고 쓰기


따로 같이 함께 | 대욱

관람 너머 | 유림

빌린 하루 | 은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 | 영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



 시간과 장소를 정하면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게 가끔은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시간과 장소를 발화했을 뿐인데 그곳에 가면 지금 여기, 네 명이 만나진 다는 게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일인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하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에 도착했다.


그날의 날씨가 잘 기억나질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엔 우산 없는 손으로 다니면서, 비가 그친 날엔 손에 우산이 쥐어져 있다고 유림에게 말했던 게 기억나, 비가 그친 뒤 거리에 나는 냄새를 기억에 섞는 지금이다. 유림도 우산을 들고 있었고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봄비의 내음을 분명히 통과했다. 가끔은 어떤 글을 쓰고 나면 그것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정말 나의 과거가 되어버린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시간도 장소도, 시간과 장소의 이름도, 나의 기억이라는 것도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림이 점점 묽어지고 섞이는 것이 삶이라 생각하며 지금도 기억을 수채화처럼 그리는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이 필연적으로 과거가 되는 순간을 통과하며 과거의 물감을 매만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어느덧 시간의 그림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단지 시간이 부유하거나 우리가 시간을 부유할지도 모르겠다고.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 지도 어플에 검색을 할 때는 명확하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을 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아득할 만큼 커다랗고 자부심이 가득한 단어들이 옹골차게 모여 있다. 우리는 모든 빠르게 보고 소화해야 할 것만 같은 시대를 공유하며 그 고유한 단어들의 조합을 국현, 또는 국현미라 입으로 불러보곤 한다. 조금 웃음이 나온다. 옆집 국현이는 문신 쟁이가 될 꺼라 그러더라. 국현이 아빠가 속이 터지겠어 아주. 갑자기 어디선가 수집했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국현미는 내가 미래에 쓸 이야기의 고지식하고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의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국현이든 국현미든지 간에 그곳에 가면 이건희의 컬렉션이 있고, 나는 이건희의 컬렉션보다 이건희의 컬렉션을 보러 길게 줄을 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며 은솔과 나란히 앉아 대욱과 유림을 기다렸다.


제일 먼저 도착해 티켓 부스 앞으로 모이라고 카톡을 보내는 은솔을 보자마자 ‘예쁘다...’라는 말부터 뱉어버렸다. 오랜만에 묶은 머리를 한 은솔이를 보고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라 나는 추측하는데, 뱉자마자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예쁘다는 말은 감탄의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뒤로는 나는 그런 류의 말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하지 않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걸 신중하다고 해야 할까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전시를 보고 나와 카페에서 대욱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검열의 시대에 살고 있고, 창작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간에 무조건 쓰지 않기보다는 그럼에도 썼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자신이 쓴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런 말로 기억했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엄청 크게 들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보다 더.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언가를 온전히 책임지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은 것 같다. 많은 것을 포기해도 온전한 책임을 진다는 건 불가능의 영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동시에 책임에도 위계와 특권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표현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기 않고 표현하고 싶다. 정확한 문장이 어느 장소와 시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위계와 특권도 없이 마음껏 표현하며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아름답고 공허하다. 뱉은 말들은 필연적으로 온전한 문장으로부터 멀어질 것만 같다. 그러다 다시 가까워지고 어쩌면 영영 사라져 버릴 지도. 점점 글 쓰고 말하는 게 어려워진다. 그럴 땐 다시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우리에 대해 생각한다. 삼월 이십칠 일, 오후 한 시, 을지로 작업실. 그렇게 약속하고 만나 써온 이 글을 나누고, 글에 대해 얘기할 우리를 떠올리다 동시에 전부 다 잘하고 싶다는 무모한 생각을 한다. 아름답다는 말을 어느 시간대에는 정확하게 뱉고, 어느 장소에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혹은 말보다는 글로써 표현해야 하는 순간에 글로 표현해내고야 마는 나를 상상해본다. 혹은 말도 글도 아닌 방식으로 발현될 표현들을 그리워해본다. 그런 세상을 소설로 쓰고 그런 소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행. 이번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보고 나의 시공간을 떠다녔던 단어는 단연코 수행이었다. 헤테로포니를 전시 작품으로 구현해낸 오민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꾸만 수행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수행’에 대해 말하기 전에 ‘헤테로포니’는 하나의 선율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연주할 때, 연주자마다의 선율이 한 데 공존하는 상태를 말하는 음악 용어다. 그걸 전시장에 구현하기 위해 그는 5개의 화면과 사운드를 활용했다. 그중 가장 안쪽의 화면에는 카메라의 감도나 셔터 속도, 초점 거리 같은 것이 검은 바탕의 흰색 격자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전시장에선 이미지, 소리, 빛, 신체, 물체가 만나 질서적이면서도 질서적이지 않은 순간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런 순간은 비단 전시장만의 수행이 아니라고 그날 카페를 가고, 이태원에 가 똠얌꿍을 먹고, 집으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도 틈틈이 생각했다. 삶이 하나의 선율이라면 우리는 저마다의 연주자가 되어 삶을 노래하고, 그것은 개별적인 삶임과 동시에 커다란 하나의 삶이 된다. 삶을 크기로 치환하면 국립과 현대와 미술과 서울, 그리고 책임과 시간을 합한 것보다도 커다랗지 않을까. 아니면 삶은 너무나도 명징하고 한편으론 모호해서 무게도 냄새도 모양도 없을까. 수행은 그렇다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삶을 연주하는 과정일 것이다. 수행을 사전에 찾아보면 ‘행실 따위를 닦음, 혹은 따라서 실행함.’이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한다는 차원에 있어서 수행은 적극적인 단어처럼 들리는데 내게 있어서 수행을 정의 내리자면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흐름에 몸을 맡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은 매 순간 삶을 유영하는 것이다. 몸의 힘을 빼고 물 위에 떠올라 빛을 몸에 통과시키며 포착하고 싶은 그림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각자의 걸음으로 전시장을 돌고 나와 하얀 바닥 위에서 각자 인상 깊었던 작가를 꼽는 순간이 있었다. 유림은 헤테로포니의 오민 작가를, 은솔과 나는 최진숙 작가를, 대욱은 김상진 작가를 골랐다. 각자 왜 그 작가를 꼽았는지 이유가 궁금했는데, 화장실을 다녀와 대화에 늦게 합류한 나는 각자가 꼽은 작가만 알게 되었고, 왜 그 작가를 꼽았는지에 대해 이후에 물어볼 수 있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것을 상상의 영역에 두고 내가 관찰하고 수집한 그들의 입장에서 그 전시를 다시 한번 감상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을 발화하지 않는 종류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비겁한 일일까. 아름답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상상 속 그들과 전시장은 문득문득 떠올라 그날부터 오늘까지 계속되었으며 발칙하기도 엉뚱하기도 했다. 나는 유림이 좋아하는 고양이와 웹툰, 유림이 필름 카메라로 담은 빛이나 작업실 같은 것을 떠올리며 오민 작가의 <헤테로포니> 속 허밍을 들었고, 대욱의 시어로 자주 등장하는 빛이나 그가 매만지는 서체를 떠올리며 김상진 작가의 <I will disappear>을 다시 보았다. 최진숙 작가의 <큐빗 투 아담>을 체험할 때는 가장 큰 스크린을 멀리서 볼 수 있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내가 ‘어느 누구의 것도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없는’이라는 노랫말을 반복해 들을 때, 한쪽에 스크린을 가까이 마주하고 실제 하는 여성의 밀려나는 생을 관찰하는 은솔과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그것에 대해 곱씹었다. 내가 그린 그들이 나를 보고 웃거나 고개를 돌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만난 건 그들이기보단 그 순간 내가 연주해낸 그들이었고, 그걸 느끼는 순간 내가 그들과 그날 그곳,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벅차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시장의 하얀 바닥 위에 우리가 공존하던 순간이 온전하게 수집되는 순간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는 달라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만큼은 우리가 함께한 수행이었다.


우리는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며 서로를 글로 쓰게 될까. 그날에 대해 쓰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틈틈이 떠올려야 했을 테고, 서로를 표현하기 위해 곱씹은 시간이 한번 더 우리를 같은 시공간에 데려다 놓을 거라고 나는 믿어본다.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넷이 그곳에 도착하고, 각자의 시선을 나누고, 시선으로부터 잠시 만나거나 엇갈리고, 그럼에도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지고, 글을 쓰고 다시 만나는 것. 나는 그것이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몸에 힘을 풀고 이 글을 둥둥 띄워 보낸다.




2022. 04. 11

<같이 전시를 보고 쓰기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오.>

영훈 쓰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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