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유난히도 뜨거운 여름이었다. 눈에 띄게 선선해진 밤공기에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한낮은 여전한 더위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가을은 미약하게나마 본연의 힘을 내고 있다. 기다렸던 연락 같은 이 시절을 후회 없이 보내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는 한편에 미뤄둔 음악과 책을 마음껏 소비해 보는 것이다. 9월의 끄트머리에 서있다.
복잡한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곳이 있었다. 드라이브 다운 드라이브가 되려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 좋은데 마침 적당한 장소가 생각난 것이다. 이렇다 할 기약 없이 간직해 두었던 공간에 가는 날에는 우선 든든하게 주유를 하고 가급적이면 세차까지 해준다. 온갖 먼지가 씻겨 내려가 말끔해진 외관을 보면 내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랄까.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양귀자 <모순>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팀당 최대 3곡을 신청하여 들어볼 수 있다. 나는 탱고의 거장, 피아졸라의 대표곡 중 하나인 ‘Oblivion’을 신청했다. 여러 버전의 연주가 있지만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이 2019년에 발매한 앨범에 수록된 곡을 골랐다. 스트리밍임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음향은 나를 잠시 콘서트홀로 데려갔다. 황홀한 4분 간의 바이올린 연주가 이어졌고, 나는 손에 든 소설책을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집어든 소설은 예상외로 술술 읽혔다. 드라마 또는 영화, 온갖 영상에 치여사는 나에게 문장을 읽어내는 데 필요한 능력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고독하고도 우수에 찬 피아졸라의 망각을 듣고 있는 지금, 양귀자가 표현한 망각은 어떠한 망각일까. 양귀자는 그녀의 소설 <모순>에서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고 말했다.
망각은 상실에 가깝지만 때로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인 것은 아닐까. 양귀자의 문장에 담긴 우리의 이기적인 기억력 덕분에 나는 현실의 우려는 잠시 잊은 채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크든 작든 상처는 망각하고 대신 자주 고마움을 느끼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장님은 출입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자주 놀러 오세요.“라고 말했다. 이곳이 꽤 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나는 그러겠다고 덜컥 약속해 버렸다.
https://youtu.be/n6idiKuDiZM?si=VEsOGriPQNtP0n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