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B trainer
Jun 02. 2024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딸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종잡을 수 없는 선배의 변덕에 견디기 힘들어 사직서를 냈다. 그 얘길 들은 우리 부부는 '잘했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다닐 필요는 없다. 아직 젊으니 진로는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라'고 했다. 어느 곳이든 스트레스는 있는데 좋은 직장을 그만 두면 어쩌냐는 소릴 들을 줄 알았다가 잘했단 말을 들은 딸은 힘을 얻어 간호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9개월 만에 4명만 뽑는 어려운 관문을 뚫고 오늘 합격을 했다. 저녁 식사를 약속하고 집에 가는 길, 딸과 있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2003년 1월 선배의 배신으로 보증을 섰던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 이리저리 뛰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감당할 수 없을 큰 빚을 떠안게 되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생을 포기하려 맘먹고 비 내리는 여름날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는데, 아내는 출근했고 아들은 밖에 나가고 딸만 홀로 있었다. 어린것을 두고 떠나려니 가슴 아팠지만 마음을 정했기에 잘 살라는 말을 던지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11살 딸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우산을 들고 1Km나 내 뒤를 따라왔다.
돌아가라고 고함쳐도 계속 따라오는 딸을 뒤로하고 많이 울었다. 못난 것도 아비라고 저러는 아이를 두고 지금 죽으면 딸에게 가난에다 더 큰 상처를 얹는 것, 고통스럽지만 어떻게든 살며 견뎌서 아이에게 세상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리라 다시 마음먹었다.
그때 일을 세월이 지나 아내에게 말했는데 그 말을 전해 들었는지 좀처럼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딸이 몇 해 전 내 생일에 편지를 써 보냈다. "아빠의 존재 자체가 저에겐 큰 위로이고 버팀목이에요, 힘든 시간 버티고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죽지 않고 견디기를 잘했다. 살아서 부족하나마 아이에게 버팀목이 되어줘 다행이고 아이 잘 되는 모습을 보게 돼 기쁘다. 한창 클 무렵 집에 몰려드는 채권자들로 상처받으며 자라게 해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나, 커가면서 어머니를 많이 닮은 딸... 어머니께 못 해 드린 몫까지 합하여 오래도록 깊은 사랑을 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