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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봉칠 Jul 06. 2024

L5. 반수 시절 일기

지독히도 외로웠던 그때를 떠올리며

*부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했을 때 썼던 일기를 옮겨 왔기 때문에 글을 읽다가 우울해지거나 슬퍼질 수 있습니다. + 매우 긴 글입니다.


반수를 결심했던 이유

고등학교 3학년, 너무나도 가고 싶었던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 기적적으로 1차에 붙었지만 2차에서 떨어졌다. 서울대학교는 면접에서 떨어졌고, 고려대학교는 최저에서 떨어졌다. 인생 내내 바라던 학교를 한 순간의 실수와 능력부족으로 가지 못했단 사실은 내게 그 무엇보다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다른 학교 세 군데에 합격했기에, 그곳을 다니다가 다시 입시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으로 반수를 결심했다. 어쩌면 내게 반수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면접과 수능에 대한 내 실력은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왕 결심한 김에 일찍 준비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쌩 재수와 비슷한 반수를 이어갔다. 최저학점 9학점만 들으며 학교를 다녔고, 새내기였지만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기숙사에 들어와 공부를 했다. 매 순간 너무 힘들고 압박이 느껴졌지만 서울대 혹은 고려대를 갈 수 있다면 감수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울감과 좌절감은 깊어졌고, 매일매일을 죽지 못해 살았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손목을 긁어보다가 차마 무서워서 그만두었으며, 번개탄 구매처를 알아보다 이것도 무서워서 그만두었고, 내 얼굴 보기가 싫어서 거울을 부수고 싶었다. 우울감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공부를 이어가야 했던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아직도 반수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고 심장이 두근 댈 정도로 무서운데, 이젠 그 기억을 놓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과거의 실패에 붙잡혀 살고 싶지가 않아 졌다. 그래서 최근엔 그 시절에 자주 듣던 노래도 다시 들어보고, 일기를 꺼내보며 읽어본다. 그러다 보면 내 과거가 마냥 슬픈 일로만 박제되진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반수 시절에 썼던 일기를 풀어볼까 한다. 사실 그때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일기를 쓸 여유조차 없었고 그 시간마저 사치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남은 일기가 많지 않다. 너무 힘들어서 버틸 수 없을 때만 가끔 일기를 짧게 썼었다. 그때 나를 되돌아보면서, 반수 실패로 아파하는 나를 놓아주고 싶다.



2023년 3월 1일 : 슬픔

: 요즘은 혼자 살아가다 보니 의미 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빨래하러 가는 시간, 빨래 가지러 가는 시간, 쓰레기 버리는 시간, 쓰레기 정리하는 시간 등이다. 그 외에도 수시로 학교 홈페이지나 커뮤니티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주변사람들에게 꼬박꼬박 연락하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날리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걱정도 늘어났다. 내가 4개월 동안 자칫 잘못하다간, 혹은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아무것도 못하고 날리겠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매일매일 초긴장상태이다. 혹시나 내가 하루를 낭비하진 않았는지,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냈는지 매일 반추한다. 무섭고도 재밌다. 그게 요즘 내 기분.


새로운 공간에서 공부한다는 건 짜릿한 일이다. 기숙사에서 오래도록 공부하는 건 꽤나 아늑하고 재미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라서 마음에 든다. 그리고 허리가 피곤하면 바로 쉴 수 있는 편안한 침대까지 옆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독서실 다니는 것보다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게 더 좋을 지경.


나는 모든 일을 할 때 확신이 잘 안 서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간다. 이게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다. 확신하지 못해서 늘 긴가민가해 하지만 미래에 있을 혹시 모를 기쁨을, 아주 작을 수 있는 기쁨을 찾아내기 위해 나아간다. 뒤를 돌아보며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어떻게 보면 신중한 걸 수도. 인생을 흔히 성공했다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개 확신 없는 삶은 성공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믿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나도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보고자 노력했다. 앞으로의 일이 순탄히 풀릴 거라고 믿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난 불안하고, 불안해서 더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확신이 없더라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보단, 성공을 바라는 그 마음만은 확실하니까. 그것만 있으면 성공에 있어서 필요조건은 충족된 게 아닐까.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보다,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면 그걸로 되었다 생각할래 그냥


가끔 서글프기도 하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여유를 즐기는 룸메 언니를 보면서, 걱정 없이 친구들과 소통하고 놀러 다니는 주위 친구들을 보면서, 목표대학에 붙지 못했어도 나름대로 만족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 인생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내 것으로 꽉꽉 채워 그 누구도 들어올 틈 없이 나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공허하다. 나도 꽉 채워지고 싶다. 그걸 예전까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았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나를 채우려 했었다.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생각하니,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고, 이별을 겪으면 그 사람이 나를 채웠던 자리가 더 크게 비워지는데 왜 그렇게 타인을 통해 나를 채우려 했을까. 내가 나를 가득 채웠어야 했는데…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나는 나를 가득 채워보기로 다짐했다.


아침은 평안으로 가득 차고 밤은 낙관으로 가득 찬 삶을 살기를.


2023년 3월 8일 : 후회

사실 크게 잘못한 게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난 모든 게 내 탓이라 생각한다. 내 탓이 아닌데 내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그냥 온전히 내 탓이 맞다. 그 결과는 후회로 받아들이고.

오늘은 공부를 많이 못 했다. 수업을 들으러 갔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었고, 그 이후에는 또 수업을 들었다가, 키트를 받으러 갔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고, 그리고 저녁 수업을 듣고 과제를 작성해 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그래서 지금 7시가 넘어서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본다. 하루가 허무하다.

진짜 조금만 잘못해도 내가 나를 너무 질타해 버리니까 매일이 걱정된다. 내가 나를 못 믿으니까 더 그런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맘 편히 친구도 만나고 수업도 즐겁게 듣는데 나는 계속 눈치 보이고 아등바등하게 된다. 말과 행동이 다를 때도 많다. 머리로는 시간낭비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몸이 안 움직이는 그런 경우. 나는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걸 후회하는 날이 올 걸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못난 인간이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제로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그다지 멋있지 않다. 그걸 남들이 알아차릴까봐 두려워하고, 남들이 이미 알아차렸다 생각해서 기가 죽는다.


2023년 4월 20일 : 충동

오늘은 유명 연예인이 사망한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이었는데 어느새 그런 선택을 한 그 사람의 용기가 부러워졌다. 나도 죽고 싶다.

미래가 안 그려지고 매일 우울감에 감겨서 사니까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져있다.

모든 순간이 평가되고 좀만 삐끗해도 사회에서 낙오되는 이 세계에서 돌대가리인 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의지도 능력도 없고 성품도 못나서 아무 데에도 쓸모없는 나 자신을 누가 받아줄 것이며 받아준다 한들 난 그 삶에 만족이나 할 수 있을까. 맨날 지기만 하고 남들 눈치나 보고 후지게 쓰레기 같은 인생이나 살바엔 죽어서 편히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단 한 번도 크게 성취한 적, 기쁜 적 없던 내 삶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보고 싶었는데 그냥 다 망쳐버렸다. 모든 게 늦었고 놓쳐버렸다. 죽고 싶다. 그 연예인이 부럽다.


2023년 9월 24일 : 원망

오늘은 7시에 깨서 8시부터 차근차근 주어진 계획을 수행했다. 매우 뿌듯했다. 2시쯤 밥을 먹고 바로 방에 와서 오답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 마무리 하고 다시 건너가서 잠시 유튜브를 봤다. 근데 그 꿀 같은 휴식시간에 언니가 와서 한심하다고 한심을 푹 쉬며 갔다. 아침부터 말끔하고 기분 좋던 내 하루를 무시한 것 같아 화가 난다. 그리고 내가 방에서 계속 놀기만 하는 줄 아나보다. 난 독서실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집에서 공부하는 건데도.


우울감이 심해지다 못해 잠식하려들자 난 정말 정신병에 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 독서실을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좁은 공간이 내 숨통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아서 힘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진짜 우울증에 걸리기 전에 나를 좀 지켜야겠다 싶은 생각에서 그만두게 된 거다.


원래 난 집에서 공부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공부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독서실을 안 다닌다는 게 공부를 안 하겠다는 얘기가 아닌데 왜 주변에선 자꾸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다. 언니는 내가 집에서 공부하는 게 못마땅한지 자꾸 나를 공부 안 하는 애 취급을 하며 말한다. 다 짜증 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본인의 생각은 다 맞고 내 상황이나 처지는 1도 생각 안 하는 그 오만함이 같잖다.


어제 엄마가 나한테 혼자 방에서 공부하면 정신이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진 않냐고 걱정하며 물었다. 올해 1월부터 계속 그래왔고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데 그걸 이제야 물어본다는 게 좀 웃기긴 했다. 그래서 그냥 둘러 말했다. 힘들다고 말하면 내 약점을 들키는 것 같아서 그동안 누가 힘드냐고 물어보면 괜찮다고만 답했다. 진짜 괜찮은 척 가벼운 연기까지 해가며 내가 매일 자살을 염원하는 사람처럼 안 보이게 애썼다. 심지어 엄마한테까지도. 그랬더니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인 것처럼, 힘든 것도 없이 탱자탱자 노는 애처럼 보였던 걸까


왜 나는 쉽게 상처를 받을까. 왜 나는 쉽게 약점을 잡힐까. 왜 나는 항상 누군가의 먹잇감이 돼 버릴까. 약점 잡히기 싫어서 대학이라도 잘 가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했으니 절망감이 심하다. 매일을 좌절하고 매일이 고통스럽다. 매일마다 기도한다 제발 나 좀 죽게 해달라고. 제발 아무 병이나 괜찮으니 시한부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하고 싶은 게 많고 꿈도 많지만 그걸 이룰 자신도, 능력도 없으니 어차피 실패만 가득할 삶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고통 속에서 꺼내달라고 매일을 개같이 기도한다. 내가 이렇게 쉽게 여기는 내 목숨을 누군가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쥐어 준다면 그게 더 가치 있는 삶이지 않을까 하면서.


아침엔 꿈에 겨웠다가 밤만 되면 자살 충동이 든다. 웃기게도 혼자 피내서 죽긴 무서우니까 목매달아 죽거나 번개탄으로 질식사해서 죽는 방법만 생각했다. 다른 방법도 다 찾아봤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난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하면서. 내게 그 사람들은 겁쟁이들이 아니다. 세상이 무서워 죽음으로 도망친 자들이 아니라, 용감히 죽음을 선택한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사실 일기라도 적으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시도했는데 일기를 적으니 내 현실이 피부로 와닿아서 더 죽고 싶다. 고등학교만 지나면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한 날들이 올 거라고 믿었던 내 바람은 지금 와 생각하면 참 우습다. 불행 뒤엔 행복이 아니라 더 큰 불행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불행이 보인다는 건, 빙산의 일각처럼 이제 시작이라는 예고일 뿐인데 말이다. 같잖은 희망에 붙들려 산 결과가 겨우 이거이니, 내가 더 이상 뭘 바랄 수 있을까. 이 소원이 하늘에 닿아 내가 곧 죽어주길,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갈 수 있길 또다시 빌어본다. 내 20살이 자살만 생각하는 하루하루로 채워질 줄 누가 알았을까?


2023년 9월 27일 : 꿈

재수를 하면서 삶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점차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창작하며 살거나, 전문성을 갖추고 살고 싶다. 사실 전자에 더 끌린다. 종합적으로는, 끊임없이 발전적인 삶을 추구한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 말고 그 이상의 가치를 찾고 싶다.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고 보람찬 것,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변호사 같은 전문직이 되면 안정적이고 좋겠지만 잘 모르겠다. 창작할 수 있고 전문성도 갖출 수 있는 교집합의 일은 무엇일까 계속 찾다 보면 분명 알 수 있겠지


2023년 10월 7일 : 희망

학교 커뮤니티에서 매우 부정적인 글을 봤다. ‘20대 인생이 꼬이는 과정’ 이런 내용이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일들을 마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양 적어놨더라. 성급한 일반화를 정말 싫어하는 나이기도 했고, 그 글을 아주 조금 읽었는데도 괜히 불안감이 생겼다. 재수 중이다 보니 이입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난 절대 그 루트를 겪지 않으리 다짐했다. 두 문장 정도만 읽어서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만의 건설적인 삶을 추구해 나가리. 꼭 부끄럽지도, 헛되지도 않은 삶을 살길. 난 해도 안 된다, 시간이 조금밖에 안 남았으니 못한다, 난 잘하는 게 없다, 이런 핑계와 갉아먹는 말들은 전부 버리고 할 수 있다, 오래 걸려도 꼭 해내고 만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안 되는 건 없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긍정은 내 성공을 위한 시작이다, 낙관이 아니다, 내 삶에 후회는 되도록 남기지 말자, 이런 말들만 남겨두겠다. 지금 당장은 좁은 시야에 갇혀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자. 남들이 엑스를 외칠 때 홀로 예스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난 압박 속에서도 해낼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내 미래는 화창하다. 난 해낸다. 해내고야 만다.


2023년 10월 15일 : 침잠 (주의 : 매우 긴 글)

학습된 무기력. 그게 나를 잡아 삼킨 듯하다. 아무것도 못하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느낀다. 너무나 패배주의에 침잠해 있고 지금 내 손에 쥐어지는 결과라곤 아무리 해도 해도 여전히 그대로인 성적. 진짜 최선을 다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곤 말하지 못한다. 열심히 하다가도 점수가 늘 안 나와서 너무나 자주 좌절해버리고 말았으니. 매 순간순간 1분 1초 전부 최선을 다하진 않았다. 그 최선이 너무나 공포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순간에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것도 최선이라 불릴 수 있을까


대부분의 시간을 국어와 수학에 부었고, 어느 정도 실력이 올랐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의시험을 칠 때마다 점수는 처참하다. 여태껏 짧은 삶을 살면서 내가 좌절했다가도 늘 힘을 얻었던 이유는,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들었기 때문. 그리고 아주 작은 성과를 통해 노력을 증명받았었기 때문. 1분짜리 발표를 잘 성공시키거나 친구들한테 칭찬을 들었다거나 그런 아주 작은 성과에 대한 인정 덕분에 뿌듯함 덕분에 계속 정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매 순간 돌아오는 인정은 “넌 절대 할 수 없을 거다”라는 주문같이 느껴진다. 아무리 많이 풀고 방법을 찾아도 내 안에 깊숙이 들어오질 않나 보다. 이걸 많이 푼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정말 자주 들었지만 그래도 늘 시도해 봤다. ‘언젠간 되겠지, 언젠간 될 거야 분명.’ 이렇게 간절히 되뇌면서, 그냥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무책임한 낙관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래서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싫었던 건데, 당시에는 내가 살아갈 방법이 긍정을 찾는 것뿐이었으니 그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안 될 사람인 걸까? 나는 신의 미움을 받는 걸까? 내 잘못도 있다. 아침에 일찍 깨는 걸 아직도 힘들어하고, 하루를 우울로 점철되어 보낸 적도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체처럼 보낸 적도 많으니. 나도 그런 내가 한심하고 객관적으로 비난받을 일인 것을 안다. 그런데 어떡해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못하겠는걸. 펜을 잡는 순간 서러워서 눈물부터 나는 걸. 반복된 실패가 내 미래를 잡아먹는 게 온전히 느껴지는 걸 내가 피하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었던 걸.


내가 무엇을 그리 욕되게 굴었던 건지


타인에게 피해 안 끼치고 큰 사고 안 치고 단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았는데, 그리고 그게 열심히 사는 것이라 믿고 부끄럼 없이 살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멋진 삶을 살진 않았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내 삶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 눈에 띄게 멋있는 삶을 살진 않았으니 위에서도 나를 보지 못했던 것이겠지 아무래도.


화창한 미래가 있을 줄 알았던 2023년에는 내가 그래도 그동안 미약하게나마 쌓아왔던 것들에 대한 보상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남아 있는 친구는 한 명도 없고, 내 생사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이들도 없다. 오롯이 혼자 남게 되었다. 그 공허함은 나를 좀 먹는다. 그동안 타인을 위해서 살아왔던 나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난 20년은 좀처럼 생각해도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이었다.


남들은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희망을 찾을 때 난 이미 그 희망을 다 소진해 버린 듯하다. 애초에 그 희망의 총량도 나에겐 조금만 주어졌던 걸까?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난 그마저도 타고나질 못했다. 내 한계를 일찍 알아차렸음에도 모른척했던 탓일까 그렇다면 내 한계를 뛰어넘으려 시도했던 그 많은 일들은 다 무의미해져 버린 것일까 누군가는 특히 나는 지금 이 사색도 걱정도 일기도 무가치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다. 지금 내가 이걸 적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그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 수능이 며칠 남았다더라, 정신 차려라 그런 말, 당연히 맞지


나도 알고 있다 내가 한심하단 걸. 이딴 걸 적어가면서 내가 내 자신에게나마 위로를 구걸하는 모습이 참 멍청하다는 걸 안다. 그냥 살려고 적는다. 단지 살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내 슬픔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적는다.


병원에 가서 지금 내 상태를 진단받아보고 싶다. 하루종일 안 좋은 생각만 너무 많이 들고, 심지어 문제 풀 때도 ‘죽어라, 죽어버려라, 가치 없는 년아,’ 이런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때보다 더 심한 수준으로 올해는 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도 내가 나를 비난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꿈을 꾼다. 그래서 밤이 싫다. 내가 제일 싫어지는 순간이라서 너무도 싫다.


난 왜 이거밖에 안 될까 욕심도 야망도 많은데 능력이 없고 능력을 쌓고 싶어도 발전이 안 보인다. 하는 건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안 될 운명인 건지, 운명이란 것이 진짜 존재해 버리는 것인지, 신이란 있는 건지, 신이 나를 벌을 주는 것인지 묻고 싶다. 내가 올해 너무 못나게 굴었던가요 그래서 진작에 나는 포기해 버리신 걸까요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답을 매일 구한다.


왜 신은 나를 데려가지 않는지, 내 생을 내가 이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왜 그냥 살려두는 건지, 진작에 죽게 해 줬으면 내가 나를 이렇게 혐오하진 않을 텐데 하면서 또 한 번 나와 신을 원망한다. 사실 신께는 부끄럽고 나에게는 원망스럽다.


내게 너무 미안하다. 지금껏 너무 잘못 살아온 것 같아서. 너무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아서, 중요한 순간에 도망친 한 순간의 실수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게 놔둬서, 애써 그 상처를 위로하려 해서, 그냥 내 존재 자체가 부끄럽고 욕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시에선 한순간 꿈을 꾼 적이 있는 얘기가 나온다. 본인도 좌절의 순간과 타인들의 조소를 등지고 한순간의 꿈에 신이 났던 적이 있었단다. 그 문구가 내 상황과 비슷해서 자꾸만 그게 기억에 남는다. 나도 한순간의 희망으로, 의지로 부풀어 오른 적이 많다. 그러나 그런 긍정의 기운은 금방 소모되고, 전부 소모되면 또다시 불행의 나날들이 찾아오더라. 더 큰 불행이 찾아오더라. 마치 네가 뭔데 그런 희망을 갖냐는 듯이. 행복과 희망 뒤엔 늘 더 큰 절망이 있어서 난 앞으로 다시는 행복을 바라고 싶어지지 않아 졌다.


올해 전까지만 해도 난 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살아왔다.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친구들과도 연락하고 동물도 키우는 삶. 빚 없이 내가 내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그런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는 삶. 근데 올해 들어서 그런 생각들은 나라는 존재에게 주어지기엔 너무 과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처럼 부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찬 사람은 어느 사람들에게나 안 좋은 영향만 줄 게 뻔하니 애초에 어울리질 말아야겠다 생각했고, 나랑 결혼하게 될 사람과 내게서 태어나게 될 아이는 무슨 죄가 있나 싶어서 그냥 앞으로 나는 절대 행복을 바라지 말고 그러니 절망도 최소한으로 겪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하고 살아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원래 로맨스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던 내가 이젠 그런 장면만 나오면 눈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단란한 가정 그런 것들은 적어도 나에겐 한순간 꿈이고 이상이라, 지금 이 순간에 혹시라도 잠시라도 안정과 평화, 행복을 느낀다면 이다음엔 훨씬 더 큰 불행이 찾아올 것이니 절대 이 순간에 현혹되지 말자는 생각이 자리 잡아 버렸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절대 몰랐지. ‘넌 행복해질 자격이 없어. 그동안 너무 무가치하게 살아왔잖아. 그러니 넌 아주 잠깐 행복한 감정이 들더라도 거기에 현혹되면 안 돼. 그 감정은 니 불행을 더 크게 만드는 씨앗일 뿐이야. 생각해 보면 네가 행복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늘 일어났어. 그러니 절대 행복하지 마’ 이렇게 늘 내가 행복한가 싶을 때마다 상기시킨다. 내가 행복하다 싶을 때 늘 엄청난 불행이 찾아왔으니. 난 절대 현혹되면 안 된다.


생각해 보니 내 학습된 무기력은 여기서도 또 드러나는 것 같다. 나는 매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가장 현혹되기 쉬운 날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내 정신이 불안정해진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꼭 좋은 날에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서, 그냥 기대를 안 하게 돼버렸다. 학습된 무기력, 그게 사람을 점차 좀먹기 시작했던 거다.


나한테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다. 좌절의 순간이 다가오면 그걸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보다 거기에 짓눌리는 게 자존심이 덜 상한다는 것이다. 나를 짓누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나를 싫어하는 존재들을 위해 큰 힘을 쏟아붓는 게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냥 무시하면 되지 이런 생각인가 보다. 그런데 이게 사회통용적이진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방식임을 안다. 그런데 왜 나는 꼭 좌절의 순간이 오면 거기에 차라리 파묻혀버리고 싶을까


난 감정동요가 심하다. 그래서 아주 작은 환경과 반응, 변수들에 민감히 반응하고 그게 도를 넘어선다. 내가 엄마나 친구들에게 얘기한 것보다 훨씬 예민하고 민감하다. 그래서 아주 작은 실패에서도 쉽게 좌절을 느꼈다. 순간순간마다 행복과 좌절을 너무 많이 느껴버린다. 안 그러고 싶지만 너무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터라 바꿀 수가 없다. 그렇게 누적된 내 좌절이 어느 순간 나를 집어삼켰고 이 부정적인 감정은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파생되어 내 모든 걸 집어삼켰다. 그래서 그런 부정의 감정과 사고들을 오롯이 극복하려면 너무나 많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 차라리 파묻혀 숨이 막혀 짓눌려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그게 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이 나약하다지만 나는 너무 나약하다. 난 하고 싶은 게 사실 많다.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지만 그에 대한 조소가 두렵다. 그게 너무 무섭다. 내가 나를 조소하게 될까 봐. 조소하지 않을 일을 찾고 싶은데 그런 여유는 이 사회에 존재해선 안 될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왜 나로서 온전할 수 없을까 나는 왜 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나이고 싶지 않은데 왜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나에게 왔을까 왜 나는 태어났을까 내가 태어남이 엄마에겐 큰 행복이었겠지만 나라는 세계에선 가장 큰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하늘에서 인간사를 바라보는 한 포기 생명의 씨앗으로 날아다니는 존재로 끝나버렸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행운임을 안다. 경제력은 조금 부족해도 나를 자식으로서 존중해 주는 좋은 부모님을 두었으니 그것만으로 행운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행운이다. 그런 점들은 감사하다. 사실 매우 감사해야 될 일이다.


실모를 풀 때마다 점수가 별로 안 좋다. 특히 국어가 정체돼 있다. 그래서 수완도 풀어보고 다시 주간지도 풀어보고 하지만 도통 실력이 오르질 않고, 실수가 줄질 않는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다. 국어나 수학 모의고사를 보고 난 후에 점수가 안 좋으면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 이게 수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생각하니 정말 너무 고통스럽다. 나는 안 될 인간임을 매일마다 증명받는 기분이다.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 봤자 내 노력이 부족했다고밖에 안 말할 거고 내 얘기는 오로지 핑계로만 들을 테니 여기다가 그나마 적어본다.


그래서 난 엄마가 날 믿는다고 혹은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대단하다고 대견하다고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괜히 화가 나고 슬퍼진다. 위로해 주려는 말임을 알고, 이해받는다는 기분이 들어 감사하다. 그런데 나는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그 상황은 하나도 모르고 하는 말일테니 괜히 기분이 안 좋아진다. 나는 나를 너무 혐오하고, 스스로가 가치 없음을 매일 평가받으며 살아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 같아서 더 그런 것 같다. 물론 엄마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동시에 내 시험 점수가 안 좋으면 호되게 나를 책망할 테니 그 순간이 두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한테 혼날까 두려운 게 아니라 나를 한심하게 바라볼 그 시선, 내가 나를 버려버리고 말 그 선택 모두를 통감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난 올해 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 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게나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꽤 했었지만 그래도 버틸 구석이 한 두 개씩 있어서 가벼운 치기라고만 생각했다. 또 꼴값을 떠는구나, 아니면 뭐 진짜 자살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냐 이런 자아성찰을 하면서 가볍게 넘기고자 했다. 그런데 올해는 진짜 내가 실행으로 옮겨버릴까 두려웠다. 사실 그 연예인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팬이 아니었음에도 며칠간 마음이 안 좋았다. 되게 안 좋았다. 그때 나도 매일 너무 큰 자살충동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동시에 부러웠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실행에 옮긴 그 용기가 부러웠다. 나는 모든 것에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까지 선택하지 못하면 겁쟁이에 불과한데 그분은 용기 있게 본인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실 정말 부러웠다. 나도 편안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정말 많이 알아봤는데 그런 건 드물더라. 고통스럽게 죽는 게 더 많으니 그게 무서웠는데 그걸 선택한 그분이 부러웠다.


차마 엄마에게 미안해서 죽진 못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자살을 택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엄마이다. 엄마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진작에 죽었을 거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엄마도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죽을 수 없는 이유사항에 엄마가 포함되지도 않을 정도로 너무 힘들다. 매일마다 ‘엄마한테 좀 미안하겠지만 나 마지막으로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나’이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난 너무 남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는 오롯이 나를 위해 살아가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남을 위해 살았다는 건 이타적으로 살았다는 말 보단 그들의 눈엣가시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을 의미한다. 사회적 매장을 당하지 않기 위해, 사회 속에서 내 가치는 타인으로부터 정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물론 나는 이 생에서 이기적이기보단 이타적이긴 했다. 그게 오롯이 타인을 돕기 위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타인에게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음이 동기였을 뿐. 그런 종합적인 이유에서 난 너무 남의 눈치만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내가 오롯이 이기적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몇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족들은 좀 슬퍼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것도 사실 얼마 안 갈 걸,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며칠 혹은 몇 달 동안은 자주 생각나겠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옅어지고 언젠간 나를 잊어버릴 테니, 어차피 나는 친구도 많이 없으니 생각보다 내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은 얼마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죽어도 괜찮겠거니 싶었던 적도 많다.


내 사색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내게 도움이 되진 않으니. 오히려 부정적 생각을 늘리기만 하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 주지 않고 내가 지금 이렇게 안 좋은 상황임을 다른 사람들이 이걸 읽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게 이거다. 자꾸만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에 더 이상 파묻히지 않으려면 조금씩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태생이 부정적이라 긍정을 생각하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긍정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늘 부정이 내게 따라온다. 그래도 난 이 안 좋은 상황을 너무나 극복하고 싶다. 그게 진짜 내 진심인 것을 알고 있다. 난 이 상황을 피할 때도 있지만 사실 매일 부딪히려 노력하고 부딪히는 이유는 정말로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게 가능한 빨리 극복하고 싶기 때문임을 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상처가 너무 아파서 너무 자주 쓰러지는 것 같다. 매일매일 너무 높은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다.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매일 달려가서 부딪히고 달려가서 부딪히고 해 보는데도 너무 단단해서 아무런 미동도 없는 그런 느낌. 어깨에 상처가 나도 또 나니까 그걸 못 버텨내고 매일을 울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금방 치료하거나 혹은 나보다 더 큰 상처가 나도 꿋꿋이 버텨내는 데,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조금만 상처가 나도 금방 아파하고 금방 주저앉아버리니 그게 너무 한심하고 원망스러운 것이다. 다시 일어나서 부딪히지만 결과는 똑같고 상처는 상처대로 나 버리니 그 상황이 너무 싫다. 힘은 빠질 대로 다 빠져서 다시 벽에 부딪힌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지만 미련을 못 버려서 아주 미약한 희망을 가지고 다시 부딪히지만 상황이 여전함을 알고 오늘도 똑같은 좌절을 겪었다. 그래서 또 주저앉아버렸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을 반복해 버렸다.


언젠간 그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언젠간 나도 그만 슬퍼할 수 있을까 언젠간 나도 나로서 오롯이 서게 될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닐까 진짜 불행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운명이 있다 해도 그걸 극복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하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나를 또 휘감고 나는 그에 또 침잠해 버린다. 그 가라앉음은 언제 시작됐는지도 몰라서 땅속깊이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다. 나는 극복할 수 있을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오래 걸린다면 어떡하지. 앞으로 다시 부딪쳐도 안 되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신은 나를 미워하나 봐. 그동안 잘 살아왔어도 지금 잘 못하니까 바로 날 버렸나 봐. 아니면 나를 위한 신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질 않았나 봐.

그동안 내 삶을 다 부정하게 돼버린다. 친구도, 돈도, 성과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를 누가 좀 위로해 줬으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부디 나를 온전히 이해해줬으면 싶지만 불가능함을 깨닫고 또 좌절한다.


죽고 싶다.


2023년 10월 20일 : 주연, 조연

그런데 이제야 진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게 된다. 나는 이번 생에서 주연이 될 수 없다. 엑스트라가 아닌 조연으로 남을 수 있기만을 바라야 할 뿐, 주연의 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그게 내 분수이고 타고난 운명인 것을 이제와 인정한다. 자칫 잘못하면 단역 중의 단역으로 남을 수 있어서 매 순간 신중해야 하는 그런 서슬 퍼런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게 나라는 존재이고, 타고난 팔자는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는다. 행복이란 것도 그 팔자를 뛰어넘어 실현되는 게 아니라 그 팔자 안에서만, 그 제한과 구속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주제에 맞지 않는 한낯 꿈에 매료되어 내 위치를 알지 못한 지금의 나를 없애고 싶다.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인생의 파노라마가 이미 보인다. 불행만 이어질 내 삶이 너무 선명히 보여서 매 순간을 버텨내질 못하겠다. 지금껏 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비참하다니. 그 최선은 사회적 기준에 맞는 최선이 아니어서 그랬던 거겠지. 난 더 이상 미련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올해의 마지막이 오기 전, 나는 죽을 것이다. 정말로 완전한 실패를 맞게 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앞으로를 살아갈 용기가 나질 않는다.


2023년 11월 5일 : 고려대학교 1차 합격

고려대학교에 너무 입학하고 싶다. 가서 하고픈 프로그램과 동아리, 공부, 연구등이 너무 많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거기 다 있더라. 그래서 너무 가고 싶은데 그냥 걱정과 불안이 희망과 함께 아주 잠깐씩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해야지.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고, 지금 현 상황에 충실하면 미래는 저절로 따라오리라. 내가 묵묵히 내 일을 성실히 다했다면 분명 내게도 좋은 기회가 오리라. 내 인생은 내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 내 미래는 분명 행복하리라. 행복한 일들이 더 많을 것이리라. 후회 없는 과정을 밟으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오리라. 나는 무엇에 의해 반짝거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니까. I don’t need a sugarcoat! 나는 얼음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아이이니까. 지금껏 꾸준히도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뿌리를 내렸으니 앞으로는 꽃을 피울 차례니까.


2023년 11월 10일 : 고려대학교 1차 합격 이후

작년에 비해선 너무나 축복받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면접을 하루종일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준비해 볼 수 있다는 것. 마음껏 양질의 기출문제를 빠짐없이 다 풀어냈다는 것. 좋은 해설을 참조할 수 있었다는 것. 마음고생을 작년에 비해 덜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도 생각하는 힘이 어느 정도 길러졌다는 것. 여전히 부족하지만 작년에 비해선 마냥 울기만 하며 날을 지새우진 않았다는 것. 1차 합격에 기쁘다가도 금세 너무 고통과 우울감으로 빈자리를 채우던 나날이 아닌 행복과 희망으로 내 기분을 채워나갔다는 것(부단히 노력한 끝에 가능했지만). 면접의 기회라도 받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졌던 것. 그 모든 바람이 작년에는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이었는데 실현이 되었다는 것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작년의 실수는 내게 큰 아픔과 절망, 후회를 남겼지만 올해의 성장에 대한 밑거름이 되었단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참 좋았을 테지. 근데 나는 원체 그런 스타일은 아니니 앞으로도 자꾸 넘어져보는 수밖에. 넘어지고 아문 상처의 자리에 계속해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며 나아가는 수밖에. 그런 게 바로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운명론은 단지 그 사실에 좌절하는 것을 순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 같더라도 그것을 최선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담담히 나아가는 것. 그게 순응이다. 그냥 걸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니 난 그냥 걸어가야지. 희망도, 절망도 모두 내게 고통을 준다면 난 가능하면 희망을 선택하리. 긍정을 택하리. 더욱 가능하다면 어떤 감정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고 그저 내 행동에만 집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리.


감정에 기대는 것보단 내 행동에 기대는 게 더 나으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고 일어난 일을 후회하는 것보단 지금 현재에 내가 하는 것에 충성을 다하는 게 더 나으니까. 내 발걸음을 나도 알 수 없지만 그저 믿고 따라가 봐야지. 내 주변의 행복을 잘 찾아봐야지.


끝맺으며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고, 행복한 순간이 돌연변이라고 합니다.

원래 인생은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면, 과거의 상처도 아물지 않을까요

아직도 전 반수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때 제가 많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애처로워서요.

결과적으론 입시에 또 실패했으니 제가 반수시절을 딱히 잘 보낸 것 같진 않습니다. 남들은 저를 욕할지 몰라도, 저는 저라도 제 자신을 지켜줘야 하니 자꾸만 애처로운가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옅어지겠죠 제 기억도, 그때의 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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