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냄/ 김인혜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 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두는 중입니다......여인, 내 그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리다. 죽읍시다. "더블 플라토닉 수사이드(double platonic suicide: 정신적 동반자살)인가요? 아니지요.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지요......여인은 내 그윽한 공책에다 악보처럼 생긴 글자로 증서를 하나 쓰고 지장을 하나 찍어주었습니다. "틀림없이 같이 죽어드리기로."
_이상, <슬픈 이야기: 어떤 두 주일 동안>중에서 p.155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을 네 개의 챕터로 모아 놓은 책이다. 30명의 화가가 소개되어 있는데 친숙한 화가들도 있었지만 3장, 4장으로 넘어가면 처음 들어보는 화가들이 너무 많았다. 그 이유는 바로 월북한 화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느낌이 들어서 화가 난다'는 총평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예술의 영역은 역시나 돈과 결부될 수밖에 없고 그 당시 만석꾼, 지주의 아들, 딸로 태어나 일본유학이라는 비슷한 행보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보통 많은 화가들이 소개된 책을 읽다 보면 스토리가 너무 짧아서 읽다 만 느낌이 드는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모았는지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느껴진다.
봉준호 감독, 발레리나 강수진,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솔비,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등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의 3세라는 점이 친숙하면서도 신기한 부분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장 자리가 세습이 되던 때도 있었다니... 이런 것까지 책에 실은 저자의 의도가 궁금해지기도...
1장 화가와 시인의 우정
2장 화가와 그의 아내
3장 화가와 그의 시대
4장 예술가로 살아갈 운명
유독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는 올 초 독서모임에서 했던 이상의 <날개> 덕분이다. 1장인 화가와 시인의 우정 편에서 <곡마단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경성의 두 천재> 이상과 구본웅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나의 관심을 더 끌었던 인물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변동림이다. 20세기 한국 문예계를 대표하는 두 천재 예술가의 아내이자, 동시에 수필가이자 화가로 활동하며 독자적인 삶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인물로 소개된 여인이다. 인생에서 두 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한 명이 이상, 다른 한 명이 김환기라니?
이상은 변동림과 결혼하지 4개월 만에 일본으로 홀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불령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신세를 지면서 급격히 폐결핵이 악화되어 병원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 후 변동림은 딸을 셋 둔 이혼남 김환기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김환기의 아호인 향안으로 이름을 바꾼다.
변동림은 구본웅 화백과도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언니가 구본웅의 아버지와 재혼을 해 이복 이모가 된다.
<서로가 존재했기에 마침내 완성된 우주>라는 소제목의 주인공이 바로 김환기와 김향안이다. 지금의 김환기
화백이 있기까지 내조의 정석을 보여주는 일화는 감동을 너머 숭고미까지 느껴졌다.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신념을 지닌 배우자를 만나는 것만큼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환기미술관을 지을 때 문고리하나까지 김향안 여사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미술사를 쓰는 큐레이터들에게 환기미술관은 '할많하않'이라는 말이 있다. 즉 그림과 글을 미리 검열을 받는 유일한 곳이라고. 그래서 김환기와 김향안에 대한 나쁜 이야기는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변동림이자 김향안의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이 내게는 유니콘 같다고나 할까?
김향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김환기를 위해, 화가의 아내라는 일종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지원했다. 뉴욕 체류 시절에는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고, 종일 글을 옮겨 적은 필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내조라기보다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부부임을 넘어 '동지'에 가까웠다. p.159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백영수 화가이야기를 했다.
양평에 있는 북카페 <평평>은 80년대에 머무른 듯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곳이다. 커피와 팥빙수를
시켜놓고 카페를 눈에 담던 중 낯익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파란 하늘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아이가 그렸을 법한 모자상이 있는 표지, 바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리커버 한 표지였는데 여전히 이 시그니처 그림은 살아남아 있었다. 요즘 멋스럽게 리커버 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정성이 없네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 책을 읽게 되고 백영수화가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나의 생각이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역시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1922년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스무 살도 안된 어머니는 백영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간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출중했던 백영수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사카미술대학에 입학한다.
하루에 크로키 200장을 그릴만큼 그림에 매달려 교수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때 오사카 집이 폭격으로 무너지자 조선으로 돌아온다.
하루에 200장씩 크로키 연습을 하던 실력을 발휘해 1950년대 신문과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 그리는 일을 많이 했다.
화가로서 다시 재기한 계기는 26살 연하의 제자인 김명애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1971년 그의 나이 49세에 딸을 얻었다고 하니 얼마나 귀하고 예뻤을까? 아내와 딸을 통해 점차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작가의 삶을 알고 나서 그의 작품 <모자상>, <모성의 나무>, <별>이 달리 보였다. 당연히 < 난쏘공>의 표지도 다시 보였다. 이렇게 딱일수가 없었다.^^
아~ 인간의 간사함이여.
식민지, 전쟁, 해방공간이라는 어수선한 시대에서도 예술을 할 수 있었던 그들의 의지와 열정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살롱 드 경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인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도 그 메시지가 나오니까. 'All that I know is just goin' on & on & on & on(내가 아는 것은 단지 계속해서 가는 것뿐이다.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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