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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프란츠 Nov 27. 2024

섬섬한 섬

야생에서의 삶


항해 기술이 발하기 전 고립된 상태였다. 접근하기 어려운 맹지 같은 에 표류한 사람들은 오도 가도 못해 굶주렸고, 괴상하게 생긴 낯선 생물 만났고, 검은 깃발의 해적이 숨겨둔 보물을 찾았다. 섬은 사방이 가로 유배지로도 안성맞춤이고, 육지와 달리 맹수도 살지 않아 가축을 방목하기에 적합했다. 그렇게 섬은 무언갈 몰래 숨길 수 있는 비밀 공간이었다.    


그런데 섬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는 건 쉽지 않다. 대체로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 암초보다 넓은 땅을 말하지만, 대륙 섬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질학이나 생물학 방법에 따라 별도의 지각판과 독특한 생태계를 갖춘 마다가스카르는 대륙일 테지만, 그린란드를 포함한 작은 땅을 섬이라고 규정하자 마다가스카르는  섬이 되었다. 그렇게 바다 둘러싸인 을 어떻게 부를지는 정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섬이라 부르는 게 애초엔 대륙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생활 주변엔 같은 곳에 있어도 무인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으려고 벽을 쌓았거나,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채 고립된 것이다. 그들은 혼자 슬픔을 감당한다. 삶의 고통절망을 견디고 이겨내는 것, 그러한 삶에 감사하는 건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섬에 갇 사람에게 감사를 강요하는 행위는 폭력적이. 종종 고립된 섬는 사람에게 원치 않는 선을 쑤셔 넣고 감사함을 따지는 경우를 본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삶의 고통을 잘 참았고 지금은 극복했으니 당신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선 타인에 대한 고통이나 절망 따위를 느낄 수 없다. 쁘게 포장된 선의와 섣부른 동정심을 내미는 건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기 까닭이다. 그들이 손쉽게 기부했던 위로는 누군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신당동에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해 5년간 도시락을 배달했다. 독거하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을 찾거나 그들이 찾아갈 가족들은 없었다. 인들은 겨우 한 명이 빠져갈 수 있는 개미골목 안에 위치한 쪽방촌에 살았고, 한두 평 남짓한 방에서 알 품 닭처럼 꼼짝 하지 않았다. 도시락 가방을 들여놓을  일부러 인기척 소리를 내면, 그들은 살아있다는 신호를 끙끙거리며 냈다.  


노인들이 배달했던 도시락을 내놓지 않는 건 한 끼 반찬을 며칠씩 나눠 먹기 때문이었다. 무더운 여름철 되면 쪽방촌의 음습한 기운 뒤섞여 고 냄새가 났다. 도시락 배달에 처음 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냄새 당혹스러워다. 그런데 나는 그 냄새가 왠지 익숙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맡았던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는 세상에 남길 마지막 흔적 같은 것이었다. 생의 끝에서  노인들은 그렇게 자신을 쪽방촌 이불자락에 눕혔, 언뜻 들리는 발자국 소리 눈을 떴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보면서 섬이란 것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유람선 침몰 후 떠밀려간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다투고 배신했다. 유일하게 물고기를 잡을 줄 아는 청소부가 캡틴이 되지만, 그녀는 구조되길 바라는 무능한 부자들을 경멸했다. 그리고선 그들에게 먹을 걸 조금씩 나눠주며 감사와 복종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 섬은 사실 휴양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 나는 오만, 잔혹, 생존, 평등 같은 단어 떠올다. 리고 인간은 극한 조건에서도 관계를 통해서만 생존할 고 생각했다. 하지만 람들은 무관심고 그래서 모두 불행에 다.


누구도 혼자 세상에 태어날 수 없기에 삶에 있어 관계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관계는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누구도 땅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를 맺을 땐 참아야 하는 것도 많다. 친구라도 마뜩잖은 구석이 있고, 자식도 손 봐주고 싶은 습관이 있는 것처럼, 타인의 모습 다 내 맘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어울려 살아다. 그것은 작은 먼지들이 뒹굴면서 만 회색 털뭉치 같다.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깃털처럼 날아갈 것 같지만, 관계의 끈을 놓을 순 없다.


여행을 다녀온 지뉴 작가님은 하와이 섬이 노숙자와 야생닭의 천국이랬다. 노숙자는 세상 가장 자유로운 일광욕을 즐기고, 야생닭은 호텔, 정류장, 음식점 등을 가리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곳. 그곳에선 빈곤처럼 두른 파란 비닐천막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자신도 한 달쯤 그렇게 노숙자처럼 살면서 반려닭 '김치'와 한번 호젓하게 살면 좋겠다고 했다.


하와이 야생닭은 본래 폴로네시아인이 이주하면서 데려온 닭이다. 그러다 우연히 탈출한 객체가 번식했고, 1992년 섬을 휩쓴 허리케인으로 농장들이 무너진 틈 타 급증하게 된다. 야생에서 닭들은 시시때때로 울고, 주민들이 아끼던 텃밭까지 헤집어 작물을 먹어치운다. 런 생뚱맞은 풍경이 관광객에겐 재만, 주민들은 번거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야생닭 아에서 활개 치는 것을 보면 주민들이 그것의 생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사람 손에 길러진 동물을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게 과연 좋기만 한 걸까? 친구 말에 따르면 어항 속 물고기를 물에 떠내 보낸다고 모 그걸 좋아하 않을 것이라 했다. 어떤 금붕어는 금방 죽을지도 모르는 방생을 기꺼이 거부하리 것이다. 진정한 자유 자연 상태로의 방치가 아니라, 보호받고 의지대로 살 수 있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나는 어떤 물고기도 자발적으로 어항 속에 들어가 않았을 거라 반박했지만, 어느 면에 친구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자연 상태가 늘 온전할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와이 야생닭은 주민들을 불편하고 피곤하게 만들지만, 멸종되지 않고 살아있다. 그것은 단순히 야생에 방치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준다. 람들은 존을 위해 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먹이를 구하거나 새끼를 보살피는 야생닭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다치지 않게 기다리거나 길을 양보한다. 생명은 인간뿐만 아니라 닭에게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일 테다.


이 땅 위에서도 그렇게 분절되고 구분되는 존재들이 방치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면 좋겠다. 섬 같이 작아서 때론 불편하고 신경 쓸 일도 많겠지만, 조금 더 참고 양보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이 고립된 섬을 만들지 않도록, 가냘픈 삶을 보듬고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야생 같은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자료>

* https://www.britannica.com/story/is-australia-an-island

* MBC 뉴스투데이, 2022. 5. 19. 방송 <휴양지 하와이, 야생 닭 창궐 골치>

* 사진출처: Unsplash

* 브런치 작가 지뉴님의 <별 준비 없이 떠난 하와이 여행기> https://brunch.co.kr/brunchbook/mangoas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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