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흐르는 강물처럼
간단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다 아파트 입구 편의점에 붙은 전단지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
아르바이트 모집
오전 7 : 00 ~ 15 : 00
오후 16 : 00 ~ 23 : 00
학생, 주부 환영
남편이 진 빚의 금액을 이야기했을 때 우리 대화에 내 퇴직금이 거론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전세 대출을 상환할까? 작은 카페를 차릴까? 고정 수입이 없으니 여유 자금으로 들고 있는 게 나을까? 많은 고민으로 쉬이 결정하지 못한 채 할머니 속 고쟁이 깊은 곳에 숨겨 둔 돈처럼 아끼고 있었다. 남편을 안다고 자부했지만 이번 일은 꽤 예외적이었다.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보루를 설정하라고 그리 설파하더니 빚을 끌어다 주식투자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그도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하고 조소했다. 한편으로 자존심 강한 그가 공황장애를 고백하고 도와 달라는 제스처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을까 생각하니 짠하기도 했다. '내가 숨긴 건 빚이 아니라 실수'라며 끝까지 궤변으로 한 끗을 내려놓지 않던 면은 여전히 그 다웠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앞집 여자와 마주쳤다.
"어머! 어머머머머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어머머 반갑다."
사교성 좋은 앞집 여자는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말을 건넸다. 회사 생활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톤과 매너이다.
"아.. 저 쉬게 됐어요. 당분간"
아차 '너무 좋은 떡밥을 던져 줬는데' 하는데 역시나
"아 그럼? 혹시 아침 열 시쯤에 커뮤니티에서 티타임 모임이 있거든. 거기 나올래요? 이럴 때 동네 사람들 알아두면 좋지. 여기 7층, 지수 엄마도 회사 다니는데 쉴 때마다 그렇게 나와서 회사 이야기를 해요. 우리랑 스트레스 푸는 거지. 자기도 그래."
"얼마 못 쉬어서 안될 것 같아요. 나중에 진짜 여유되면 생각해 볼게요.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지를 주었다간 나중에 정말 고단한 거절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단호히 하고 집에 냉큼 들어왔다. 사실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 집은 이런 상황인데 당신들은 어떻게 사냐? 어떻게 해결하냐 묻고 싶고 궁금했다. 그들과 상황을 나누다 보면 계측이 될 것 같았다. '앗 선을 넘었네' '나는 너와 이 시련을 함께 할 수 없어 이혼이야' 이렇게 말이다. 갑자기 예전에 본 영화에서 나온 대사 한 구절이 생각났다.
'완전히 이해는 못 해도 완벽한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피가 아닌 선택으로 만들어진 가족을 어디까지 용인하고 취사하는 것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갚아야 하는 것도 아닌 갚아 줄 수 있는 돈 앞에서도 주저하는 인간은 완벽한 사랑 따윈 할 수 없는 것이다.
'고기 사놨어. 일찍 들어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남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