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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S Feb 08. 2024

열대야가 초대한 밤손님



30도를 웃도는 열대야가 지속되던 고1 여름, 우리 가족의 더위를 책임지던 에어컨이 갑자기 고장 났다. 늦가을에도 선풍기를 켜고 자는 나에게 이보다 절망적인 소식은 없었다. 에어컨 수리신청이 폭주하여 빨라야 열흘 후에나 A/S 기사님이 오실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이 무더운 여름밤을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길 몇 차례.. 평소에는 없던 두통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황금 같은 주말 밤을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울화도 치밀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순간, 살짝 열어 놓은 방문 틈 사이로 갑자기 주황색 불빛이 스쳤다. '오늘은 일찍 준비하시네?' 주말이면 새벽 낚시를 곧잘 가시는 아버지가 거실에서 낚시 장비를 챙기시나 보다 했다. 1분쯤 지났을까? 다시 한번 주황색 불빛이 스치더니 '끼~익, 퉁퉁퉁' 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분명 거실 벽장문 열릴 때 나는 소리였다. '벽장에는 가족사진과 인형 밖에 없는데..' 이상했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거실로 나가려는 순간 '어? 울 아버지 서치라이트 불빛은 하얀색인데..' 그제야 거실에 있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주뼛주뼛 솟고 무더웠던 방 공기가 순식간에 한겨울 칼바람처럼 차가워졌다. '설마 집에 도둑이 든 건가.. 어떡하지.. 도둑이 나갈 때까지 조용히 있을까.. 부모님도 방문을 열고 주무시고 계실 텐데..'


두려움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는 평생 후회 할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를 악 물고 손톱으로 양쪽 귓불을 세게 꼬집은 나는 어떡해서든 도둑을 내쫓겠다는 일념 하나로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오른발에 온 힘을 실어 방문을 힘껏 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고 나는 목이 터져라 '당신 누구야!!!'라고 소리쳤다. 벽장 앞에 서 있던 검은 그림자는 아~악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들고 있던 플래시로 내 얼굴을 비췄다. 앞이 보이질 않아 무서웠다. 급하게 왼팔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 한번 "당신 누구냐고!!!" 소리쳤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도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열려 있는 베란다 창문을 통해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담을 넘어 도망치는 도둑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열려 있는 창문을 잠그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내 몸을 감쌌다. 뭐랄까, 해코지 없이 바로 도망친 밤손님에게 느끼는 고마움이랄까?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실로 나온 부모님과 동생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곧이어 아버지가 112에 신고를 하셨고 조금 후 경찰관 몇 분이 집을 방문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주민들도 우리 집 앞에 모여들었다. 경찰관과 함께 집 주변을 면밀히 살폈고 낮에 더워서 열어 놓고 미처 잠그지 않은 베란다 창문을 통해 도둑이 침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거실에만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아 도둑이 집에 머문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라진 물건도 없었다. 경찰관은 인근에 유사 절도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도둑의 인상착의를 내게 자세히 물었다. 체격, 옷차림 등 기억나는 대로 답했다. 야간 순찰을 늘리고 필요하면 또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경찰관은 돌아갔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우리 집은 동네주민이 돌아가고 나서야 진짜 평온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끓여주신 대추차를 마시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창문이 잘 잠겼는지 각자 눈으로 확인하고 잠자리에 드는 루틴을 이어갔다. 덕분에 이 지독한 열대야를 열흘 동안 창문을 다 잠그고 선풍기에만 의존하며 버티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뭐 그 일로 더위를 조금 덜 타게 된 건지 모르겠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가끔 자기 전에 그때를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에어컨이 고장 난 그날 새벽에 밤손님이 찾아온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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