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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Apr 25. 2024

나는 축구가 좋다.

프리미어리그에 궁둥이가 들썩이는 녀자

어렸을 때 티비를 보며 뭐라뭐라 열을 내는 아빠 옆에 앉았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축구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이기는 거냐고 했더니 지금 오른쪽과 중간 사이에 있는 저 공을 오른쪽 골대에 넣으면 우리가 이긴다고 했다. 어린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빨간색 옷이 공을 가지면 다른 색 옷이 계속 뺏어 가기만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길 수 있는 거지? 어른들은 이걸 왜 보는 거지? 나는 제법 진지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보면 강팀은 아니니까 역시 어린이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그날을 떠올리면 자꾸 다른 팀만 공을 잡아서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또 한 번 국가대표 경기를 보게 됐는데 이번엔 드디어 우리가 골을 넣었다. 그때의 미칠듯한 짜릿함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부터 축구가 좋았다. K가 홍대병(나의 안목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로)이라고 놀리면서도 인정해 주는 건 나만의 지성이형 발굴 스토리다. 나는 교토퍼플상가에 갔을 때부터 박지성을 좋아했고,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에 발탁됐을 때 뛸 듯이 기뻤다. 그때 남자친구들은(여자친구 중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박지성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게 누구냐면서 역시 뭘 모른다고 했다. 그래놓고 월드컵에서 활약한 박지성을 보고 원래 기대가 컸단 듯 구는데.. 웃기고 있네, 정말. 난 이 이야기를 70대가 되어서도 할 예정이다.


이후 나는 월드컵만 손꼽아 기다린다. 2002년 이후 4년마다 국대는 늘 답답한 경기를 했지만 나에게 월드컵은 그것을 뛰어넘는 축제기간이다. 매일 볼 경기가, 그것도 죄다 국대인 경기가 있으니 당연히 신날 수밖에. 다른 나라 경기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새벽경기라도 다 보고, 보지 못한 경기는 하이라이트를 본다. 이러면서 네이마르를 알고 넋이 나갔던 기억이 있다.

아시안컵도 열심히 봤습니다만

요즘 가장 큰 관심사는 프리미어리그이다. 그 시작은 단순한 이유지만 역시나 손흥민이고, 지속적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다른 리그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기 때문이다. 글을 적고 보니 도파민이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잠깐 모른 척하기로 한다. 지성이형의 맨유 시절도 모든 경기를 밤새워 보진 못했다. 그때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축구에 많은 애정을 쏟지 못했다. 솔직히 쏘니(박지성은 지성이형, 손흥민은 쏘니여야 내 입에 착 감기는 이유는 뭐지..)가 독일에 갔을 때부터 모든 경기를 본 건 아니다. 토트넘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경기를 틀어놓기만 하고 띄엄띄엄 보거나 하이라이트를 봤다. 근데 1-2년 전부터 나에게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제 다시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내어 줄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제대로 봤다. 이건 뭐 신세계다. 커다란 운동장을 성큼성큼 뛰고 샤샤삭 제치고 발밑에 패스가 탁탁 가질 않나 사정없이 태클을 걸고 골을 막 그냥 시원하게 넣어 버린다. 미치게 예쁜 궤적을 그리더니 공이 뚝 떨어졌는데 골이란다. 하 아름다워라.


빠져들수록 더욱 매력적이다. 감독이 왜 중요한지 이제야 완전히 이해했고, 경기마다 바뀌는 혹은 경기 도중에 바뀌는 세부전술도 재밌다. 선수들의 이적과 그에 따라 생기는 여러 조합, 호흡. 요즘은 프리미어리그 5위 팀까지는 모든 경기를 생방으로 다 보고, 챔피언스리그 보고, 국가대표 경기도 당연히 본다. 라리가는 엘 클라시코만 보고 분데스리가는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못보겠다. 리그앙도 재미없지만 이강인 출전 경기는 본다. 이렇게 야무지게 챙겨보지만 대부분 경기가 주말에 있기 때문에 야구팬이 부러울 따름이다.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축구팬으로서 좋은 점이 벌써 생기고 있다. 우선 유럽 쪽으로 갈수록 시차가 줄어드니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저녁 8-10시에 보는 프리미어리그라니! 또 하나, 운이 좋으면 국가대표의 원정경기를 볼 수 있다. 원정석은 자리가 많지는 않지만 그만큼 표를 사는 사람도 적기 때문에 경쟁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국가에 따라 매우 다름 주의). 그렇게 3월 태국과 치른 월드컵 예선을 직관했다.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가 한창일 때 한 운동장에서 주전으로 뛰는 걸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걸 의외의 장소인 태국에서 이루게 됐다. 사진첩을 보면 몸풀기와 전반 시작에 찍은 동영상이 있고, 그다음이 경기 후 선수들이 인사해 주는 영상이다. 난 모든 걸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극강의 집중력으로 단 한차례도 한 눈 팔지 않고 경기를 봤다. 우리가 가는 나라마다 국가대표가 오면 참 좋겠다. 하하.

내가 뛰는 것도 아닌데 심장은 왜 터질 것 같은지.

축구에 대한 맛을 알아가던 학창 시절에는 국가대표 경기만 보면 누구 못한다고 욕하며 입축구를 해대는 어른들이 너무 이상했다. 쳇 본인들은 뛰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뛰는 선수들이 불쌍해지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난 맥주를 마시며 방금 패스한 선수 누구냐! 와 진짜 빼라 좀!!! 을 외치는 진상 어른이 되었다. 반면에 마지막 휘슬이 울리면 땅이 10cm 정도 꺼진 듯 22명 모두가 주저앉아 버릴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선수들에게 감탄하고 존경을 표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빅경기는 몇 주 전부터 궁둥이가 들썩들썩하고, 실망스러운 경기를 보면 왜 맥주를 안사왔지 싶고, 어느 팀이든 선수가 다치면 세상 속이 상한다. "나는 축구경기가 매일매일 있었으면 좋겠어." 며칠 전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매일 키즈카페에서 놀고 싶은 아이랑 다를 바 없는 마음이다. 이제 내 취미를 축구보기로 바꿔도 될 것 같다.

맥주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진짜에요 정말입니다.

아, 글을 다 쓰고 보니 이 얘기를 빠뜨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은 단연 <뭉쳐야 찬다>이다. 첫회부터 지금까지 진심으로 단 한 회도 빠뜨리지 않고 봤다. 문제라고 한다면.. 예능을 자꾸 다큐로 본다는 것이다. 선수 다 분석하고, 내 스타일인 선수가 생기고, 자꾸 열받게 하는(ㅋㅋㅋ) 선수가 생긴다. 저 사람은 대체 연습은 하는 건지.. 이렇게 예능 꼰대가 되어 가지만 뭉쳐야 찬다의 종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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