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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틀비와 함께 Apr 25. 2024

그러려니 하는 마음

[역류성 식도염]     

띠링     

"현재 강의하기로 한 김 선생님이 수업자료를 안 보냈습니다. - 이 아무개"     

전철 안에서 울린 문자를 확인한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곧 입 안에 침이 고였고, 조금만 더 있으면 전철 안에서 토할 것 같았다. 다행히 전철은 역에 정차한 순간이어서 바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플랫폼으로 나오자마자 정신이 들었고 울렁거리던 속도 진정되었다. 전철을 타기 전에 들린 내과 의사가 나에게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흔하지만 가장 어려운 처방을 내려줬다.     


문자를 다시 보았다. 뱃속이 뒤집히는 만든 건 연락이 안 되는 김 선생님이 아니라 '이 아무개'라는 이름이었다. 나에게 '이 아무개'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이 아무개는 일을 하자라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모든 일에 안 되는 것만 찾아 말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런 사람을 처음 만나봤다. 흔히 인복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운이 다한 것이다. 프로젝트나 공동작업은 항상 어렵지만 그래도 신이 났다. 혼자 공부하는 나에게 공동작업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 신나게 보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알게 해 준 계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하고만 일했었기에 모두 나 같고 그들 같은 줄 알았다.     


나에게 ‘이 아무개’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었다. 이런 사람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결국 이름만 봐도 울렁거리는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말았고, 결국엔 수술까지 받았다. 수술은 괜찮았다. 오히려 건강을 찾는 거니까 좋았다. 두려운 건 수술 후 또다시 그들과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수술보다 고통스러웠다. 『최선의 고통』이란 책을 소개한 장동선 박사는 "내가 잘하는 거, 좋아하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을 견디고 그다음으로 진행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라고 한다. 나는 프로젝트를 좋아하고 때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겪을 고통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이 아무개는 괴물이었다.    


[괴물을 피하는 법]

없다. 

그 당시 나의 입장에서 괴물을 피하는 현명하고 멋진 방법은 없었다. 현실적으로 삼십육계 줄행랑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아무개를 이해하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관계를 개선하라는 이야기는 나에게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은 이 아무개와 최소한으로만 연락하고, 부딪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악착같이 다른 곳으로 갈 방도만 찾았다. 사실 둘 다 너무 어려웠다. 회의든 회식이든 모임은 피할 수 없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지만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새로운 일자리 역시 그렇게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괴물을 피한 후]

그러나 어디든 가고 싶다는 나의 간절함은 나에게 무엇이든 할 힘을 주었다. 수술 후 회복하면서 정말 열심히 이직 준비를 했고, 기회를 잡아 결국엔 이직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직하면 그곳이 천국일 거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람 때문에 힘든 건 답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 덕분에 행복하고 그 사람 때문에 지옥에 간다. 이직한 곳에서 나는 다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함께 하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시 인복이 생긴 것 같다. 여느 직장인처럼 다 오르는데 내 월급만 안 오르네, 세금이 뭐 이렇게 많이 나가, 시스템이 이상해 등등 푸념한다. 그래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

지금 조금 여유로워지니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도 내가 이해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 그들도 나를 괴물로 여겼을 거라는 생각. 우리는 서로에게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상대방에게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상대방도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영원히 평행선으로 달리는 타인과 만나 함께 일하는 거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하자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편해졌다.     


[소곤소곤]

지금 다시 이 아무개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그 사람과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할 거다. 상대방에게 바라는 건 없지만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건 용납이 안 된다. 이 아무개는 아마 지금도 같을 거로 생각한다. 나도 똑같으니까. 세월은 변하지만 이상하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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