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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준 Mar 12. 2024

2. 아이에게 필요한 그림의 크기

저의 그림인생을 되뇌어 보면 도화지 크기는 실력을 핑계 삼아 연령에 맞춰 줬던 훈장과 같은 것이었어요, 위계의 한 측면이었죠.

아잇적 우리에게 주어졌던 도화지는 8절, 학교 준비물로 지정되었으며 책상 위에 올려두기 적당한 크기였던 8절, 아잇적 우리는 그 이상의 크기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집 내벽에 그림 그리는 것은 상상도 못 했고 허락되지도 않았어요. 중학교 올라가서야 4절을 만져볼 수 있었고, 본격 미대 입시를 위한 석고 데생을 시작해야만 구경할 수 있었던 3절은 학원이란 특별한 공간에서나 경험이 가능했어요. 소형 석고상을 끝내고 대형 석고상으로 시험 치르는 이들은 2절 위에 긴 선을 그어 볼 수 있었고, 서울예고에서 최고 실력을 갖춘 친구가 선생의 권유로 전지 크기에 석고 데생을 했던 사실이 타학교에도 소문이 퍼졌던 사건은 아직도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모두가 그 친구의 실력과 전지 위에 뎃생이란 것에 놀라고 부러워했을 뿐, 어느 누구도 전지에 그림을 시도하지 않았어요.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냥 그렇게 함이 마땅한 당위적 사건이었으니.


2012년 가을, 아이들과의 첫 수업에 전지 크기의 종이를 준비하는 옆지기 모습에 제가 놀라움과 걱정을 드러냈을 때, 옆지기는 단호했습니다.

 “왜? 아이들이 못할 것 같아?” 

청소년기와 대학과정을 외국에서 보낸 옆지기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거죠, 6살 아이들이 얼마나 거침없는지를.  

하늘과 나무와 꽃과 새를 그린 연아, 유빈, 윤주. 윤주는 이어 꽃을 한 장 더 그렸습니다. 생명을 품은 씨앗을 꽃 속의 꽃으로 표현했어요. 6살적 송연아 송윤주 임유빈의 첫 수업


저는 여기서 한계와 제한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위생이나 안전의 문제 따위가 아니라면, 성장하는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깨닫고 깨뜨려나가는 과정을 거듭해야 합니다. 작은 공간 안에서 집중력으로 파고드는 ‘긴 호흡의 한계’, 넓은 공간에서 거침없이 펼쳐나가는 ‘스케일의 한계’는 누군가가 대신 설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고 계획하고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어려서 느꼈던 종이 크기의 한계는 어른이 설정해준 한계였으며, 그것은 진정한 한계가 아닌 제한이었으며, 그 제한은 위계의 강압적 통제였으며, 그것은 아이의 자발적 경험이 아닌 어른의 지시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 생각과 감정과 경험과 느낌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게 예술이라 했을 때, 아이가 행위와 계획의 주체가 아닌 어른의 제한과 설정 내에서 학습한다면, 그 미술수업은 진정한 예술과 거리가 멉니다. 창의성을 높여주는 창의적 교육의 측면에서 보아도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창의적 사고에서 중요한 창작은 동기부여가 있어야 하고, 동기부여는 자신이 선택하여 결정하는 자율성이 중요하니까요. 

어른과 선생이 해주어야 하는 것은 다양한 크기와 재료와 방식의 권유입니다.

아이들의 멋진 모습을 보신 유빈 어머님께서 카페의 한 벽면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처음엔 물감이란 재료에 집중하던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상상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땅 속의 용암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강아지까지. 7살적 송연아 송윤주 임유빈 그리고 9살 송민준 작품.

바닥에 색칠한 분필과 파스텔은 비가 내리면 깨끗이 지워집니다. 이웃의 동의를 얻은 차량 없는 안전한 공간에서 즐거운 시간을 종종 보낸답니다.

돌맹이를 주워 그림도 그리고 반짝이 풀로 꾸며보기도 합니다. 7세적 임유빈 작품

선생님이 임신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걸렸던 어느날, 아이들은 손바닥 보다 작은 크기의 그림책을 스스로 만들었답니다. 7살적 임유빈과 송윤주의 공동작품

함박눈이 내린 날, 이웃집 숲교실 선생님께서 저희 딸 별이와 함께 수채화 물감을 이용한 눈 놀이를 해주셨어요.


물론 요즘은 촉감놀이 체험 프로그램에서 큰 그림 경험을 접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프로그램 내에서 정해진 경험을 할 뿐, 자신의 이야기를 꾸준히 풀어내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요. 아이들에게 다양한 크기의 종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즐기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업의 다양성을 늘 열어주는 것이죠.


우리는 집에서 혹은 야외에서 어떤 다양한 크기의 그림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전지 크기의 그림, 전지를 이어붙인 크기, 크기 제한이 없는 자연이나 야외의 허락된 장소,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 작게 낙서한 그림을 다시 커다란 그림으로 옮겨 보기. 다양한 크기를 많이 접해보면, 후에 아이는 자신이 표현하고픈 작업의 크기를 스스로 찾아나가기 시작합니다. 


크기뿐만 아니라 종이의 종류도 다양하게 즐겨봅니다. 켄트지(도화지), 캔버스, 작아져서 못 입는 옷, 얇은 드로잉 북, 포장용 갱지, 모조지, A4용지, 골판지(박스 종이) 등등. 특히 모조지는 매끄러운 특성이 있어 목탄과 파스텔의 경우 켄트지에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즐길 수 있어요. 저희 작업실에선 물을 많이 사용하는 그림을 제외하면, 켄트지보다는 모조지나 박스 종이 등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스케치북이 8절 켄트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요. 더욱 다양한 경험을 위해 8절을 제외한 크기를, 켄트지가 아닌 다양한 종이를 아이들에게 권합니다. 


집에서 큰 그림을 그린다 생각만 해도 청소하는 게 아찔 하실 겁니다. 파스텔과 목탄가루, 여기저기 튄 물감, 비닐을 깔고 돗자리를 깔아도 청소가 만만치는 않습니다. 몇 번 해봤는데 아이가 큰 그림을 즐긴다면 작은 작업공간을 설정하는 것도 좋겠어요, 가능하다면 말이죠. 하지만 해보면 늘 그렇습니다. 항상 큰 그림만 그리는 친구는 없어요. 아이들은 늘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원하더라고요.


어디에 그리 건, 어떤 크기로 그리 건, 어떤 재료로 그리 건, 어른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잘 그렸다, 못 그렸다,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독일에선 잘 그린 결과물이 아닌 발전 가능성을 보고 대학 신입생을 뽑습니다. 하물며 우리 아이들은 성장기라는 ‘성장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잖아요, 결과물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과정과 가능성이 중요합니다. 완성도가 높은지, 바탕은 칠했는지, 꼼꼼하게 칠했는지, 성급하게 끝낸 것은 아닌지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아요. 매일 꾸준히 반복 노력하여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은 음악-악기와 운동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미술은 달라야만 해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끼고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그러한 감정과 생각과 느낌 중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표현 과정에서 무엇을 노력하고 즐겼는지, 어떠한 내용이나 느낌을 담지 않고 재료 자체만 즐겨도 충분합니다. 그 과정에서 펼쳐진 사소한 순간 모두가 중요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물론 결과물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커다란 가능성을 끌어내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전문가 역시 모든 가능성을 빠짐없이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그것에 크게 연연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아이와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누며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술창작의 결과물은 성인이 되어 집중해도 늦지 않습니다. 예술창작에서의 ‘새로움'은 어느 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나만의 감각과 감정’에서부터,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나만의 경험과 고민과 통찰력'에서부터 출발하고 완성됩니다. 아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멋진 결과물이 아님을 우리 어른은 늘 되씹어야만 해요. 재료가 가진 촉감과 질감을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아이가 식상한 재료로도 ‘새로움의 충격'을 빚어낼 수 있다는 진리를, 사소한 감정과 경험과 상상력일지라도 거침없이 형상으로 뱉어낼 줄 아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 머릿속 가득한 생각을 작품으로 정리하는데 더 유리하다는 진리를 우리 어른은 늘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시멘트 바닥이 예술이 된 순간, 목탄과 분필로 그린 그림, 김도윤 8살.


다양한 크기의 작품을 즐기는 사랑이의 2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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